[횡설수설]김순덕/러브호텔

  • 입력 2002년 11월 18일 18시 28분


“동물의 세계에서 가장 희귀하고, 가장 이상한 제도가 일부일처제다.” 최근 미국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책 ‘모든 창조물에게 주는 타티아니 박사의 섹스 어드바이스’의 한 대목이다. 진화 생물학자인 올리비아 저드슨 박사는 인간도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난교(亂交)의 성향을 갖는다고 했다. 종족 번성 또는 유전자의 원활한 복제를 위해서다. 본디 난자의 수는 적고 정자는 많다. 이 수적 양적 불균형을 벌충하기 위해 나온 인간의 제도가 일부일처 결혼이요, 또 하나의 비공식적 통로가 외도다.

▷최근 영국의 옵서버지는 영국서 400만명 이상의 남편과 아내들이 불륜에 빠져 있다는 통계를 소개했다. 성인 6명 가운데 한 명 이상이 배우자를 속인 적이 있고 다섯 중 한 명은 순간의 ‘바람’이 아닌 영속적 관계라고 했다. 특히 돈 있는 계층에선 가난한 노동자들보다 50%나 더 배우자를 배신하기 쉬운 것으로 나타났다. 신사의 나라 영국이 이 정도라니 가히 놀랄 만한 일인데도 옵서버지는 “상당히 과소평가된 통계”라고 지적한다. 결혼과 일부일처제는 이제 이상적 ‘바람’일 뿐이라는 거다. 저드슨 박사를 비롯한 사회생물학자에 따르면 ‘일부일처제는 다분히 인간 본성에 어긋난 제도’인 까닭이다.

▷우리나라에선 성인 남녀의 혼외 관계에 대해 이렇다할 통계가 잡히지 않는다. 지난해 이혼소송 청구 사유 가운데 배우자의 부정이 전체의 절반에 가깝다는 데서 불륜 증가세를 짐작할 뿐이다. 러브호텔이 불륜의 온상만은 아니겠지만 미국이나 영국서 러브호텔의 난립을 걱정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에선 전국 곳곳이 러브호텔이라는 ‘사랑방’에 오염되고 있다는 뉴스가 종종 등장한다. 최근 서울 강남에 마구 들어서고 있는 러브호텔은 ‘사이버텔’ ‘멀티미디어텔’ 등 테크놀로지의 아우라(aura·분위기)를 뒤집어쓴 신종이다. 사랑에 필요한 사적 공간을 확보할 수 없는 나라, 그리고 편법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회의 한계이자 돌파구라 함직하다.

▷물론 만물의 영장 인간을 금수와 한 범주에 넣는다거나, 동방예의지국을 서구와 비교하는 건 옳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누가 뭐래도 불륜은 부도덕하다는 시각도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어린이에겐 어린이 놀이터가 필요하듯 성인에게는 어른스러운 공간도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상수도와 하수도를 철저히 분리하는 것처럼 주택가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특정구역에만 러브호텔을 짓도록 엄격히 제한한다면 ‘러브’가 문제이든, ‘호텔’이 문제이든 러브호텔을 둘러싼 시비도 시들해지는 게 아닐지.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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