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송호근/엄마 잘 만나야 대학간다?

  • 입력 2002년 11월 19일 18시 16분


입시는 겪어봐야 안다고 했던가.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일가견을 가진 교육문제를 새삼 언급하려는 것은 평소 냉소적으로 대했던 그 풍경 속에 나 자신이 끼어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능(修能)이 치러지는 학교 앞에서 하루 종일 안절부절못하는 학부모들, 어디 조용한 데라도 가서 쉴 것이지 뭐 저리도 극성인가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명색이 교수라는 사람이 시험장이 올려다 보이는 장소를 놓칠세라 교문에 찰싹 붙어 종일 불안에 떨었다. 무엇이 문제였던가.

▼한국에만 존재하는 '엄마 점수'▼

대학입시에는 이른바 ‘엄마 점수’라는 것이 있다. 엄마도 아이와 함께 고3이 되는 것은 물론 온갖 정보를 수집하고, 틈새시장을 모색하며, 입시생의 특성에 맞춰 특기 점수를 올려놓아야 한다. 경시대회 일정 관리, 과외그룹 결성, 봉사기관 알선, 내신관리에 맞춤형 학원 보내기까지 모두 엄마의 몫이다. 그렇게 엄마와 입시생의 눈치 속에서 몇 계절을 보내면 가을부터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다. 대학별로 의욕적으로 내놓은 형형색색의 전략적 입시요강을 심층분석해서 최종작전에 돌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엄마의 기지(機智)는 이쯤해서 빛을 발한다. 두 세개로 압축된 돌파구가 뚫린다면 아이는 무사히 고지(高地)에 안착할 것이다. 틈새를 발견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최종 작전을 위한 준비도 만만치 않다. 대학마다 요구하는 증빙서류를 인상적으로 꾸며야 하는 중압감이 찾아온다. 각종 경시대회 입상자료, 공인시험 성적증명서, 학교활동 증명서, 교장추천서 등을 포함해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야 한다. 원서에 적힌 경고문과는 달리 시각을 다투는 입시생에게 이 일을 맡길 수는 없다. 이게 대한민국에만 존재하는 ‘엄마 점수’인데 여기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싫으면 한국을 떠나야 한다. 교육이민이 발생하는 원인이자 현 정권 초기에 단행된 교육개혁의 ‘예기치 못한 부작용’이다.

여기까지는 그런 대로 견뎌냈다고 치자. 평소에는 성적이 괜찮은 아이가 수능에서 낭패를 본다면 초등학교부터 들인 12년의 공은 순식간에 물거품으로 변한다. 한국의 대학입시는 언어에 약한 수학천재를 용인하지 못하고, 과학에 약한 미래의 대문호(大文豪)를 식별해낼 능력이 없다. 국제정보올림피아드에 입상한 수재가 서울대에서 거부당하고 문학과 예술에 뛰어난 소질을 가진 학생이 무난히 진학할 대학이 별로 없다. 모든 과목에 탁월한 학생보다 창의력이 중요하다고 번번이 외치는 대통령과 장관이 엄연히 존재하는 나라임에도 말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내신에 충실했던 학생도 ‘원샷 수능’에서 자주 낭떠러지로 떨어진다는 점이다. 구제 방법은 없다.

지난주 발표된 자립형 사립고 안(案)은 평준화로 누적된 부작용을 개선하기는 하겠지만 문제의 본질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공급자에 초점을 맞추었을 뿐, 수요자인 입시생의 사정은 정작 빠져 있었다. 자립형 사립고와 민간위탁의 협약학교가 생겨나면 교육환경은 다소 개선되겠지만 경제력에 정확히 비례하는 ‘엄마 점수’가 어디 가겠는가. 엄마점수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중하층과 빈곤층에 대한 배려도 없다. 또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고의 사교육비(국내총생산 대비 2.7%)가 가계(家計)를 압박하는 현실이 나아질 것인가. 미국과 독일보다 더 많은 교육비를 쓰고도 괜찮은 대학진학이 어렵다면 그야말로 범국민적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공급자 위주 입시제도 바꿔라▼

문제의 핵심은 공급자 위주의 현행 입시제도 그 자체다. ‘다양성’을 명분으로 대학마다 온갖 현란한 항목들을 개발해 제 각각의 기준을 강요하는 것, 수능에 지친 아이들을 다시 시사 교양 문학세계로 끌어들여 어디로 튈지 모르는 면접과 논술에 대비토록 요구하는 것은 일종의 횡포다. 대학마다 ‘비상한 자질’을 요구하지 말라. 학업에 충실했던 학생이 그 실력에 맞는 대학을 무난히 선택할 수 있게 만드는 것, 또는 두어 과목만 잘해도 괜찮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 우선 시급하다. 수능을 3, 4회로 늘려 가장 좋은 점수를 택하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야, 나 재수한다”고 절규하거나 부모 품에 퍽 쓰러져 대성통곡하는 수능날 저녁풍경이 내년에도 반복될 것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