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로 돋보이는 정치인들도 있다. 요즘 자타가 공인하는 ‘의리의 사나이’는 뒤늦게 대통령후보로 나선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손꼽힌다. 여론조사 결과를 전적으로 신뢰할 바는 못되지만 선거운동을 거의 하지 않은 그가 뜻밖의 지지율을 얻고 있는 것은 바로 소문난 의리 때문이 아닐까. 김영삼 전 대통령이나 김대중 대통령을 수십년 동안 따르는 가신들이나 ‘집사’들의 심리상태도 따지고 보면 조폭세계의 의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조폭이 판을 치고 있다고 하지만 의리라는 게 예전 같지 않은 세상이다. 침몰하는 배에서 의리보다는 제 살길부터 찾는 모습이다. 진승현게이트와 관련해 ‘권노갑 전 민주당고문에게 5000만원을 줬다’고 폭로한 김은성 국정원2차장의 경우는 어떤가. 김 차장은 평소에 권씨에게 정보보고를 해왔다는데 아예 의리가 없는 관계였던가, 아니면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인가. 해외로 도피한 안정남 전 국세청장도 ‘정도세정(正道稅政)’을 외칠 때의 떳떳함이나 의리는 사라지고 없다. 오직 ‘삼십육계 줄행랑이 제일’이라는 본능만 두드러진다.
정권말기에 들어서면서 의리의 존재는 더 희미해진다. 정몽준 후보가 현대전자 주가조작사건에 개입했다고 폭로한 이익치 전 현대증권회장은 그자신의 말대로라면 ‘조폭적 의리’에 충실한 기업인이었다. 그는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불러서 갔더니 ‘몽준이가 별일 없게 잘 좀 해 달라’고 부탁해 내가 지시한 것으로 시인했다”고 말했다. 보스를 위해 감옥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의리와 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듯하다.
‘보스’들은 충성을 다짐하는 ‘부하’의 맹세를 듣고 싶어한다. 목숨까지 내놓겠다는 ‘조폭적 충성’은 당장은 달콤하지만 그 결과는 쓰다. 정부기관이든 기업이든 빗나간 충성경쟁은 조직을 망가뜨리고 내부의 갈등만을 초래한다. 결국은 조직의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빈사상태로 몰고간 사례가 허다하다. 현대그룹의 비극이 대표적이다. 회계조작이나 주가작전도 마다하지 않는 기업이나 불법을 저지르는 기관은 아무리 조폭을 능가하는 의리가 있어도 끝이 비참하다.
조폭보스나 기업오너에 대한 비뚤어진 충성은 오래가지 못한다. 뛰어난 리더는 자신에 대한 충성보다는 조직에 대한 충성을 원한다. 감옥에 가더라도 로열패밀리의 비리는 절대 불지 않는 충성도 사라졌고, 그런 부하를 끝까지 봐주는 오너도 없다. 비리와 불법을 의리로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달콤한 ‘충성 맹세’가 거꾸로 비수가 되어 돌아오는 세상이다. 그래도 ‘조폭적 충성’을 바라는가.
박영균 논설위원 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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