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민의 영화속 IT 세상]‘가십’의 헛소문 네트워크 탔다면…

  • 입력 2002년 11월 24일 17시 42분


데이비스 구겐하임 감독의 영화 ‘가십’(2000년작)은 헛소문, 정확히 말하자면 의도적으로 조작된 소문을 다룬 영화다. 실제 뉴스와 소문에 대한 차이를 설명하라는 과제를 받은 대학생들이 한 남학생이 술 취한 여학생을 강간했다는 소문을 퍼뜨리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고 있다. 남의 얘기는 쉽게 한다고, 진실이 아닌 거짓 소문은 잘도 퍼져나간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소문은 다행히도 학교라는 울타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인터넷 게시판과 e메일, 인스턴트 메신저 프로그램 같은 첨단 의사 소통 수단이 동원됐다면 얼마나 빨리, 멀리 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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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인스턴트 메신저 프로그램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수다 떨기(채팅)’를 확산시킨 일등 공신이다. 메신저 프로그램은 결코 진지하지 않다. 글 쓰기는 말하기보다 공이 들지만 자판에 글을 ‘치는’ 것은 말보다 쉽다. 메신저 프로그램으로 소통을 한다면 깊고 유장한 사고의 흐름은 애초에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사고는 물기 없이 메말라 툭툭 끊어질 지경이다. 두뇌는 제 기능을 상실하고 손가락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옳고 그름이나, 나의 말이 몰고 올 결과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얼굴을 맞대고 전할 때보다 소문은 쉽사리 변질되고 증폭되며 빠른 속도로 확산된다.

문득 궁금해졌다. 나와 인스턴트식 의사 소통을 나누는 지인은 몇이나 되는가. 로그인해서 보니 내 리스트엔 서른 명 남짓한 이름이 올라와 있다. 다들 무척이나 가까운 이들이다. 이들에게 최근 몇 년 동안 손으로 쓴 편지를 보내본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메신저 프로그램에 대해 굳이 변명을 하자면 이런 식이 될 것이다. 남들이 모두 잠든 고요한 새벽, 메신저 리스트에 남아있는 온라인 표시를 보면 가슴이 설렌다(나 혼자만 깨어있는 게 아닌 것이다). 멀찌감치 숨어서 그녀의 방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있던 기억이 떠오른다. 메신저 프로그램에 접속할 때마다 이렇게 외치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외롭지 않다, 나는 외롭지 않다고.

IT칼럼니스트 redstone@kgsm.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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