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박재창/´고객중심 政治´ 보고 싶다

  • 입력 2002년 11월 26일 18시 34분


우리는 오늘날 정치 실험의 시대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구촌 최대 화두 중 하나가 바로 새로운 정치 양식 도입이기 때문이다. 일반시민에게 정치적 참여의 문호를 확대하기 위한 것이라던 간접민주주의가 더이상 시민을 위해 작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진 지는 오래되었다. 이렇게 헌옷이 되어버린 간접민주주의를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하면서도, 어떤 옷이 보다 몸에 잘 맞을 것인지는 아직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공급자 중심의 정치실험▼

형편이 이런 만큼 다양한 의견과 대안이 분출할 것은 당연한 이치다. 아직 헌옷을 벗어 버리기에는 새 옷의 준비가 덜 됐으니 헌옷 위에 불완전하나마 새 옷을 한 벌 더 걸쳐 입자거나 아쉬운 대로 헌옷에 새 천을 덧대어 입자는 주장이 대종을 이룬다. 기존의 간접민주주의를 골간으로 하고 시민참여의 공간을 추가 확대하자는 ‘확장형 민주주의’, 정치적 대표자와 일반 시민 사이에서 실질적 토론과 대화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숙의(熟議) 민주주의’, 그리고 참여의 외연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포괄형 민주주의’ 등이 그것이다.

이들 모두가 추구하는 과제는 정치의 주도권을 시민에게 돌려주자는 것이다. 정치인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시민의 의견을 청취하는 수준이 아니라, 시민 스스로가 의견을 개진하고 상호 협의를 거쳐 총의를 형성해 나가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런 의도로 스코틀랜드 의회는 기존의 대의(代議) 구조와는 별도로 의회 안에 시민사회단체 전담 기구를 두고 이를 통해 1000여개의 시민사회단체를 네트워크로 연결해 놓았다. 이 네트워크를 통해 시민 총의가 시민의 손에 의해 형성되고 입법과정에 투입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스웨덴에서는 집권당이 웹사이트에 공개 포럼을 열어 시민의 자유토론을 유도하고 이를 통해 정책의 기본 방향을 정해나가고 있다. 아테네 시대의 도시국가를 연상케 하는 발상이다.

우리도 최근 적지 않은 정치적 실험에 나선 셈이다. 특히 여론조사를 통한 대통령 후보의 결정은 전 세계적으로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시도였다. 정치는 현상유지와 관성을 강조하는 속성을 지녔다. 따라서 정치를 개혁하고자 한다면 실험정신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 만큼 우리 사회의 최대 현안으로 정치개혁을 지목해 온 이들에게 이런 시도는 당연히 가슴 설레는 일이다.

그러나 한 발 물러나 보면 이런 시도가 정치의 본질을 바꾸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 여간 아쉽지 않다. 실험의 동기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실험이 정치의 근본 성격을 공급자 중심주의에서 수용자 중심주의로 바꾸는 일에 초점을 맞추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여론조사에는 과거 정치인들이 독단하던 때와는 달리 시민의 의견을 존중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치인의 필요에 따라 민의의 소재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여전히 시민은 정치적 의사결정의 주체가 아니며, 필요한 정보의 수집 대상으로 주변에 머문다.

이는 마치 상품의 제조업자가 고객의 기호를 염두에 두고 물건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해서 고객이 상품을 만드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그리고 고객 스스로가 상품을 만들지 않는 한 고객의 기호와 요구에 부합하는 상품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경험을 통해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바다. 이처럼 간접민주주의가 정치인중심주의로 변질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단순한 고객중심주의로 전환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시민주권 시대로 이행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새 시스템 제시할 후보 없는가▼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정치 시스템 고안을 위해 지혜를 모아 나가야겠다. 마침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만큼 고식적인 차원의 정치개혁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정치시스템 연구를 주요 국정 과제 중 하나로 제시하는 후보가 단 한 분이라도 나와주면 어떨까. 진정한 의미의 정치개혁은 새로운 정치 시스템의 고안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박재창 숙명여대 교수·의회행정학·미국 버클리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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