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수성의 수준에는 사람에 따라 선천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후천적인 노력으로도 감수성을 기를 수 있다면 그 방법은 무엇일까?
감수성을 기르는 기본적인 방법은 우선 오만(傲慢)에서 벗어나는 길일 것이다. 세종대왕이 통치자로서의 오만에 머물러 글 없는 백성에 대한 ‘민연(憫然)’의 정을 느끼지 못했다면, 또 시리얼식품을 개발한 켈로그가 ‘소화기가 약한 환자의 속이 불편한 것은 당연하다’며 건강한 자의 오만에 머물고 말았다면 한글이나 켈로그회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1997년 경제위기 때 대기업 도산의 대부분이 경영자의 오만에서 온 것 같다. 오만이 거품성장을 낳았고, 그것이 부실과 부도로 이어졌을 것이다. 가정에서도 ‘내가 이 집의 왕’이라는 오만 속에 살고 있는 남편은 아내가 느끼는 필요와 아픔, 정서에 둔감해질 수밖에 없다.
#낮은 곳으로 임하라
“낮은 곳으로 임하라”는 가르침은 감수성을 기르는 데도 기본적 교훈이 될 것 같다. 혼잡한 전철 속에서 구슬픈 노래를 부르며 지나가는 맹인, 그의 바구니에 떨어지는 동전 한 닢 소리가 기쁨이 되는 곳, 이렇게 ‘낮은 곳으로’ 임할 때 인간의 아픔과 필요에 대한 감수성은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고층 건물 속 호화로운 사무실, 고급 승용차의 검은 유리창 속에서 ‘가진 자’의 오만에 머무르는 사람이 일반 대중의 필요, 아픔, 정서를 얼마나 느낄 수 있을까? 소비대중과 먼 거리를 유지하는 경영자가 최고 의사결정권을 행사하는 회사에서 소비자의 필요, 아픔, 정서에 일치하는 상품이 얼마나 나올 수 있을까? 만약 나온다면 그것은 요행일 것이고, 요행은 단기적으로나 가능할 뿐 장기적으로 오래 지속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고객이 존재하는 현장으로 가라
경영자의 감수성은 고객이 존재하는 현장에서 그들과 접촉하는 가운데 발휘될 수 있다. 1950년대 후반 미국 한 제약회사의 세일즈맨이었던 윌리엄 코너는 병원에 가서 환자나 의사들을 만나 그들과 담소하면서 그들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데 일과시간의 반 이상을 썼다.
어느 날 코너씨는 우연히 안과의사와 같은 테이블에서 점심을 들게 되었다. 담소 중에 그는 안과 수술 과정에서 인대(靭帶)를 절단해야 할 때, 혈관을 다치면 출혈로 인해 수술이 어려워진다는, 그래서 인대절단에 이르면 수술의 리듬이 깨지고 의사도 긴장하게 된다는 말을 들었다. 이 말을 듣고 코너는 혈관을 다치지 않고 인대만 끊어낼 수 있는 약제가 개발되면 의사들의 스트레스 감소는 물론, 수술이 신속하고 안전하게 진행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후 코너씨는 도서관을 뒤져 인대에 관한 서적을 읽고 전문가를 찾아가 질문도 하면서 인대를 용해할 수 있는 효소 키모트립신을 오래 보존할 수 있는 약제개발에 성공했다.
이 사례가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코너씨가 병원 현장을 찾아가서 의사들과 접촉하고 대화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필요와 아픔에 대한 감수성은 발휘되지 못했을 것이고, 키모트립신도 개발되지 못했을 것이다. 감수성은 주고받음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정서적 능력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필요조건에 불과하다. 다음 글에서 제2, 제3의 조건을 찾아보자.
윤석철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 yoonsc@plaz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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