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남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므로 출세하기는 어려울 듯하지만 그래도 65세 남자 환자 C씨보다는 훨씬 낫다.
필자가 그를 처음 진찰한 것은 석달이 넘었는데 그는 외래로 진찰실에 올 때마다 내 얼굴을 몰라본다.
그는 필자가 담당 의사라는 것을 알기는 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가 필자의 얼굴을 알아봐서가 아니라 짐작으로 그러는 것이다. 그가 아들과 함께 신경과 외래 진찰실을 들어서면 앞에 흰 가운을 입고 앉아 있는 사람은 필자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필자뿐 아니라 가족, 친척, 친구, 심지어 함께 병원을 방문하는 아들의 얼굴도 모른다. 다만 아들의 목소리, 체격 그리고 그가 평소 입는 옷을 통해 아들인 줄 알고 함께 다니는 것이다.
그가 사람을 몰라보는 이유는 그의 시력이 나빠서도 아니요 치매증세가 생겨서도 아니다. 그는 석달 전 오른쪽 후두엽(뒤통수엽)에 발생한 뇌중풍 때문에 왼쪽 시야 장애가 생겼다. 사람 얼굴 몰라보는 증세도 그때부터 생겼다. 시야장애 때문에 그가 보는 세상은 왼쪽이 컴컴하다. 하지만 오른쪽 시야는 정상이다. 따라서 그는 반쪽 시야로 밥을 먹을 수 있고, 책을 읽을 수 있고, TV를 볼 수도 있다. 그런데도 그는 사람의 얼굴을 몰라본다.
이처럼 후두엽 손상 이후 사람 얼굴을 몰라보는 증세를 ‘안면 실인증’이라고 하는데 1947년 보다머라는 학자가 처음 기술했다. 안면 실인증 환자는 사진 속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한다. 가족 사진을 보여주면 아들과 며느리의 얼굴을 구별하지 못한다. 대체로 처음 보는 사람보다는 자신에게 익숙한 얼굴, 즉 자신의 기억회로에 간직된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익숙한 관계라면 애완동물의 얼굴 역시 몰라본다. 예컨대 세마리의 개를 키우던 사람이라면 이 개의 얼굴을 서로 구별 못한다.
안면 실인증 환자를 보면서 우리는 사람의 뇌에 시각적 기억을 위한 부분이 존재함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이미 관계를 맺은 사람의 모습을 인지하는 장소가 발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시간대 생물학자 액설로드의 말은 그럴 듯하다. 그는 인간에 있어 사람 얼굴의 기억은 우리가 사회적 동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중요했을 것이라고 했다. 복잡한 사회에서 남의 얼굴을 잘 기억해 두어야 그 녀석이 나의 동지인지 적인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울산대 의대 서울아산병원 신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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