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포럼]한영우/대통령 관저 옮기자

  • 입력 2002년 12월 8일 18시 17분


나라마다 최고통치자의 관저(官邸)가 갖는 상징적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민주적인 나라일수록 관저의 위치는 수도의 중심권에 위치하고 규모도 그다지 크지 않다. 시민과의 거리를 지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좁힌다는 뜻이 있을 것이다. 워싱턴의 백악관이나 파리의 엘리제궁, 런던의 다우닝가 10번지가 모두 그렇다. 백악관을 비롯하여 대통령이나 총리의 관저 앞에서 크고 작은 데모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는 것도 시민과의 친근성이 있기 때문이다.

▼´경복궁 능멸´ 노린 일제잔재▼

외국의 경우와 우리를 비교하면, 청와대 건물은 너무나 비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이다. 우선, 청와대는 너무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것도 경복궁을 발 아래로 내려다보는 곳이니 무엄하기 그지없다. 아무리 왕조시대가 아니라 하지만, 경복궁이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재인 이상 옛 왕궁을 내려다보는 곳에 대통령이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왕조시대의 왕도 청와대보다 낮은 궁에서 살지 않았는가.

청와대가 최고통치자의 관저가 된 출발도 저의가 좋지 않았다. 원래 이 자리는 대원군이 경복궁을 지을 때 경무대(景武臺)로 불렀던 곳이다. 무인들이 무예를 연마하면서 시험을 치르고, 서울지역 유생들과 전국 유생들의 과거시험도 이곳에서 자주 치렀다. 고종실록(高宗實錄)을 보면, 고종 6년부터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200여 회에 걸친 과거시험이 이곳에서 치러졌다. 김옥균을 비롯한 수많은 인사들이 모두 여기서 시험을 치러 문과에 합격한 것으로 되어 있다.

경무대가 관저로 바뀐 것은 총독부 시절이다. 경복궁의 남쪽 건물들을 헐어 총독부를 지어 앞에서 압살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경무대에 총독 관저를 지어 경복궁을 뒤에서 협공하는 형세를 만들었다. 민족 정기를 부수려는 일본의 저의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곳이 바로 경복궁이다.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이 총독관저를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고 이름을 경무대로 바꾼 것은 식민지 잔재를 반은 청산하고 반은 계승한 것이다. 당시는 건국 초창기여서 당장 새로운 관저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므로 이해가 가는 점도 있다.

그런데 그 다음 대통령들이 이곳을 그대로 관저로 사용하고, 이름을 청와대로 바꾼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청와대라는 새 명칭은 경무대라는 본래의 이름마저 잊게 만든 결과가 되었고, 그 다음에 총독관저를 헐어버리고 새 관저를 지은 것은 언뜻 일제 잔재를 털어버린 것으로 보이지만, 왕궁을 능멸하던 식민지 잔재는 그대로 계승한 셈이 되었다.

심리적인 면을 떠나 보안상으로 보더라도 청와대는 좋은 위치가 아니다. 이곳은 인왕산(仁王山) 북악산(北岳山) 남산 등 서울의 어느 곳에서나 잘 보이는 곳이다. 도심의 고층건물에 올라가 보면 청와대 앞마당이 환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한때는 고층건물의 북쪽 창을 폐쇄한 일도 있었지만, 여간 억지가 아니다.

위치가 이렇다 보니 그 보안을 위해 과도한 경비업무가 따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왕산 일대와 백악산 일대가 요새화되고, 군경들의 경비가 항상 삼엄하다. 경복궁 북쪽 전각들도 일반에 공개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고종이 서재로 쓰던 아름다운 집옥재(集玉齋)는 구경도 할 수 없다. 시민들이 가장 가깝게 휴식공간으로 이용해야 할 귀중한 녹지공간들이 제한받고 있는 것이다.

청와대 경호실 왼편에 있는 육상궁(毓祥宮)을 비롯한 7궁이 최근 간헐적으로 공개되고 있어 다행이지만, 이 또한 경호실 때문에 7궁의 경역이 많이 축소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7궁은 영조 원종 경종 진종 장조(사도세자) 순조 영왕의 모친을 위해 지은 사당이므로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크다. 언젠가는 반드시 복원되어야 할 곳이다.

▼청와대는 시민의 푸른공간으로▼

7년 전 총독부 건물이 헐리고, 이어 경복궁이 복원되어 가면서 가슴이 탁 트이는 시원함을 느끼고, 민족 정기가 되살아나고 있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내친 김에 경복궁을 찾는 관광객들이 경복궁 후문으로 나가서 경무대로 환원된 청와대 녹지를 즐길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차기 대통령의 결단을 기대한다.

한영우 서울대 교수·한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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