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적응하기 어렵지요. 하지만 이 냄새나는 염료에 한국 화섬업계의 미래가 달려있습니다.”
경기 평택시 모곡동 송탄산업단지 내 동우섬유. 35년간 원단산업 한 우물만 파온 이 회사 손기혁 회장(64)이 막 염색 공정이 끝난 원단을 들어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초극세사(超極細絲)인 로젤 원단을 염색 처리하는 등 이 원단의 후가공(後加工) 공정을 맡고 있는 이 업체는 전체 직원이 91명인 중소기업이지만 올해만 3500만달러어치를 수출한 알짜다.
“위기 때마다 신기술 개발로 난관을 돌파했습니다. 특히 90년대 들어서는 주력 품목 교체 속도가 빨라져 수영복용 나일론, 외출복용 나일론, 여성 블라우스 등에 쓰이는 벨벳에 이르기까지 3, 4년 주기로 ‘무기’를 바꿨죠. 99년부터는 로젤이 먹여 살리고 있습니다.” 손 회장은 백발을 쓸어 올리며 지난 세월을 되짚었다.
로젤은 코오롱이 99년 개발한 초극세사. 원사 1g이면 서울과 부산을 왕복할 수 있는 길이가 된다. 로젤 원단은 높은 볼륨감과 부드러운 표면 감촉 때문에 스웨이드로 불리는 천연 가죽 대체재 시장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손 회장은 1차 원단이 7가지 후가공 공정을 거쳐 수출용 완제품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설명하다 문득 생각난 듯 “내년부터는 중국과 러시아 시장은 포기해야 할지도 모릅니다”고 말했다. “품질은 인정받고 있지만 가격을 맞출 수 없어요. 우리가 승부할 수 있는 곳은 고급 제품이 통하는 유럽과 미주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국내 초극세사 섬유도 가야할 길이 멀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최대 규모인 미국에서 시장을 늘리기 위해서는 원단으로 고급 와이셔츠 등 옷을 만들어 팔아야 해요.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염료가 피부에 묻어나지 않고 색이 바래지 않아야 합니다. 초극세사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어 염료가 붙을 자리가 별로 없죠. 이를 극복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밝은 표정을 잃지 않았다. “올 들어 유럽의 각종 패션쇼에서 일제히 로젤을 주요 소재로 채택했습니다. 이 바람이 내년에는 미국으로 옮아갈 것입니다. 전망이 아주 밝죠.”
로젤 원사로 원단을 만드는 인근 종인니트를 찾았다. 로젤 원사 1올은 24개의 가닥으로 이루어지며 1가닥은 다시 각각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느다란 36개의 초극세사로 나누어진다. 이 원사가 기계를 통과하자 하얀 로젤 원단이 미끄러져 나왔다. 바로 곁 창고에는 쌓아 둔 원단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비수기라서 그래요. 겨울 동안 열심히 만들어 쌓아둬야 봄에 수요를 맞출 수 있거든요.” 이 회사 임성규 사장의 설명이다.
평택〓배극인기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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