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인가. 무슨 일로 저 아이의 눈빛이 저렇게 타오르는가......)
그때 다시 항우가 두 눈을 번쩍이며 물었다.
“그런데 작은 아버님. 도대체 작은 아버님께서는 언제까지나 그 하찮은 작자를 상전처럼 모실 작정이십니까?”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하지만 - 어쩌면 그게 바로 오늘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와 함께 같이 가자.”
항량이 그래놓고 다시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덧붙여 말했다.
“너도 옷안에 엄심갑(掩心甲)을 걸치고 보검을 차도록 하여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언제든 내가 부르면 올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
그러자 항우의 두 눈에서 쏟아지던 불길이 조금 잦아들었다. 대신 갑자기 신명이 솟는 듯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보검이라면 주가(朱哥)놈이 말을 달려올 때부터 차고 나왔습니다. 엄심갑은 옷안에 걸치기 구차할 뿐더러 힘을 쓰는데 되레 걸리적거립니다. 이대로 가도록 하지요. 그럼 먼저 나가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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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방을 나가는 항우의 시원시원한 목소리와 몸놀림이 어둡고 불만에 찬 표정으로 말이 없던 근래의 그와는 사뭇 달랐다. 그걸로 보아 그 동안 항우는 계부(季父) 항량이 세상과 은통을 살피며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걸 답답하고 불만스럽게 여겨왔음에 틀림없었다.
항량이 군아(郡衙)에 이르니 은통은 호젓한 객청(客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때아니게 갑주를 갖춰 입어 작달막한 키에도 제법 위의(威儀)가 넘쳐흘렀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언제나 표정이 없던 그 얼굴에도 어딘가 상기된 기색이 느껴졌다.
“어서 오시오. 항대협.”
그렇게 항량을 맞는 말투도 전과는 달랐다. 언제나 항씨 아우님이라고 부르며 친한 척 너스레부터 떨던 그였다. 그 변화에 항량이 자신도 모르게 긴장해 물었다.
“이렇게 일찍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그러자 은통은 지긋이 눈을 감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뜸을 들이기보다는 평소의 희로(喜怒)를 짐작하기 어려운 표정을 되살려 보려는 듯했다. 하지만 말하려는 것이 워낙 엄청나 그런지 끝내 상기된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아우처럼 믿고 의지해온 항대협이니 둘러 말할 것 없이 바로 털어놓겠소. 이제 강서(江西·양자강 이북) 땅은 모두가 반란을 꾀하고 있으니, 이는 하늘이 진나라를 멸망케 하려는 때가 온 것이라 보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오. 듣기로, 먼저 손을 쓰면 남을 제압할 수 있고[선발제인], 늦으면 남에게 제압을 당한다 하였소[後發制於人]. 이에 나도 더 늦기 전에 이 회계(會稽)를 근거로 군사를 일으켜 저들과 함께 천하를 다투어 볼까 하오. 그때 대협과 환초(桓楚)를 장수로 앞세우고자 하는데, 대협의 뜻은 어떠시오?”
은통이 그렇게 바로 속을 털어놓자 항량은 잠시 당황했다.
(이 의뭉스런 작자가 꼼짝 않고 부중(府中)에 들어앉아 있을 때부터 뭔가 심상찮은 일을 꾸미고 있다는 느낌은 들었다. 그러나 법을 으뜸으로 여기는 진나라 관리로서 그토록 엄청난 꿈을 꾸고 있다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그렇게 엄밀하고 위압적이던 진 제국의 법망(法網)도 별 것 아니었구나.....)
하지만 오래 빠져 있을 감회는 못되었다. 항량에게 당장 급한 것은 그와 같이 돌변한 형세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은통의 속셈을 뚜렷이 알게되자 항량도 이내 그 대응을 결정할 수 있었다.
“감히 청할 수는 없는 일이오나 참으로 바라던 일입니다. 공께서 불러 써 주신다면 기꺼이 앞장서 싸우겠습니다.”
항량은 먼저 그렇게 말해 은통의 믿음을 산 다음 슬며시 덧붙였다.
“하오나 환초의 일이......“
“환초가 어찌되었다는 것인가?”
“환초가 오중(吳中)에서 가장 뛰어난 장수감이기는 하나 얼마전 죄를 짓고 택중(澤中·대택지방)으로 달아나 그가 있는 곳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제 조카 적(籍)만이 알고 있을 뿐입니다.”
“항적은 어떻게 환초가 있는 곳을 아는가?”
“환초의 수하 중에 용저(龍且)라는 호걸이 있는데 조카가 그와 매우 가깝습니다. 아마도 그 용저를 통해 환초가 있는 곳을 알게된 듯합니다. 바라건대 그 아이를 불러 환초를 데려 오라고 명하십시오”
그러자 은통이 의심쩍어 하는 눈빛을 거두며 말했다.
“그렇다면 항적을 불러 오라”
“그 아이도 저와 함께 여기 왔으나 대인(大人)의 부르심이 없어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가서 데려 오겠습니다.”
항량이 그렇게 대답하고 객청을 나와 항우를 찾았다. 그 새 항량이 있는 곳을 알아낸 항우는 객청 밖 머지 않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항량이 그런 조카를 불러 은통에게로 데려 가면서 짧게 말했다.
“드디어 때가 된 것 같다. 문밖에서 기다리다가 부르거든 들어오너라. 내가 신호하면 바로 은통의 목을 베어 버려야 한다.”
항우가 오래된 당부를 다시 한번 다짐받은 사람처럼 까닭 한번 물어보는 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객청으로 돌아간 항량은 항우를 문 밖에 세워두고 먼저 안으로 들어가 은통에게 말했다.
“제 조카 항적을 찾아왔습니다. 불러 보시겠습니까?”
“들라 이르시오”
은통이 느긋한 목소리로 그렇게 일렀다. 이에 항량이 소리쳐 항우를 부르자 기다리고 있던 항우가 성큼성큼 객청 안으로 들어왔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은통은 항우의 잘 생긴 얼굴과 우람한 체구에 반해 입이 헤벌어졌다. 제 딴에는 좋은 장수감을 하나 더 얻었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은통의 헤벌어진 입이 다물어지기도 전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항량이 갑자기 항우를 돌아보며 나직하게 외쳤다.
“때가 되었다. 손을 써라 [可行矣]! ”
그 말에 칼을 뽑은 항우가 한 마리 사납고 날랜 범처럼 은통을 덮쳤다. 번쩍 칼빛이 스치는가 싶더니 비명조차 제대로 질러보지 못한 은통의 작달막한 몸이 목을 잃고 객청 바닥에 쓰러졌다. 은통은 ‘선수(先手)를 치면 남을 제압하고, 선수를 놓치면 남에게 제압 당한다’ 는 말의 실례를 자신의 죽음으로 잘 보여준 셈이었다, .
“인뚱이와 끈[印綬]은 어디 있느냐? 그 목을 간직하려거든 어서 가서 찾아오너라!”
항우가 은통을 죽이는 걸 보고 항량도 칼을 빼어 마침 그곳에 있던 늙은 주리(主吏·工曹吏)의 목을 겨누며 소리쳤다. 반나마 얼이 빠진 늙은 주리가 벌벌 떨며 옆방으로 가서 긴 베 끈에 묶인 군수의 관인(官印)을 찾아와 바쳤다. 그걸 받아 허리에 찬 항량은 객청 바닥을 딩구는 은통의 머리를 찾아들고 소리 높이 외쳤다.
“놀라지 말라. 은통이 반역을 꾀하므로 우리가 죽였다.”
은통이 자리를 은밀하게 한답시고 사람을 물리쳐 객청 안에는 늙은 주리를 비롯한 문관(文官) 두엇과 시중드는 노복(奴僕) 몇이 고작이었다. 아무도 항우와 항량에게 맞서볼 엄두도 못 내고 그저 마루바닥에 엎드려 목숨만 빌었다. 하지만 부근에 있던 무관(武官)이나 파수를 서던 군사들은 달랐다. 사마(司馬) 하나가 변괴를 알고 관아를 지키던 군졸들을 끌어 모아 객청으로 달려왔다.
“이놈들. 은통은 이미 죽었고, 회계군의 인수(印綬)는 여기 내 손에 있다. 썩 물러나 명을 받들지 못하겠느냐? ”
항량이 은통의 머리와 인수를 번갈아 흔들어 보이며 겁을 주었으나 그들은 객청 안의 문관들처럼 쉽게 무릎을 꿇으려 하지 않았다. 항우가 그들을 노려보다가 훌쩍 몸을 날려 그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네놈들은 아무래도 관을 보아야 사람이 죽은 줄을 알겠구나!”
그런 외침과 함께 허연 검기(劍氣)가 그들 가운데를 휩쓸고 지나가는가 싶더니 피와 살이 튀고 처절한 비명소리가 뒤를 이었다. 숨 한번 길게 내쉬는 사이에 그 겁 없는 사마와 함께 객청 안으로 뛰어든 수십 명 군졸의 태반이 쓰러졌다.
그제야 놀란 군졸들이 저마다 잡고 있던 창칼을 내팽겨치고 열린 문으로 달아났다. 항우가 그들을 뒤쫓으며 벽력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이놈들 어디로 달아나느냐? 어서 항복하지 못할까!”
그 소리에 놀란 군졸들 몇이 그대로 창칼을 내던지고 마당에 넙죽 엎드렸다. 그러나 나머지는 다시 패를 지어 몰려드는 저희 편을 보고 얼른 달려가 그들 사이에 숨었다.
이래저래 관아 마당에 모인 현군(縣軍)이 어느새 백 명이 훨씬 넘게 되자 항량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항우는 조금도 움츠러드는 기색이 없었다. 양떼 속에 뛰어드는 호랑이처럼 그들 속으로 뛰어들어 무인지경 가듯하며 베고 찔렀다.
다시 수십 명의 죽고 그보다 더 많은 군졸들이 다쳐 관아마당을 즐비하게 덮었다. 기록에는 그날 항우가 쳐?戮?사람만도 백 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하지만 싸움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갑자기 새로운 함성과 함께 또 한패의 군사들이 나타났다. 이번에 군사들을 이끌고 온 것은 바로 그 아침에 항량을 부르러 왔던 주(朱)교위였다.
“주무(朱武). 네 감히 나를 대적하겠느냐?”
고막을 찢어놓을 듯한 그 한마디로 주교위와 군졸들의 얼을 한꺼번에 빼놓은 항우가 문득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무언가 단번에 그들 모두를 위압해버릴 수 있는 길을 찾는 것 같았다. 마침 객청 축대 아래에는 세 발 달린 커다란 청동 솥[(鼎]이 하나 놓여 있었다. 거의가 나무로 된 관아 건물을 화마(火魔)로부터 지키려고 물을 담아두는 것인데, 솥 무게만도 3백 근이 훨씬 넘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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