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아동문학상을 받은 재미동포 2세 여류작가 린다 수 박의 이 소설은 12세기 때 청자 생산지로 유명했던 전북 부안군 줄포가 그 무대. 출신을 알 수 없는 ‘목이(木耳)’란 이름의 아이는 다리 밑에서 살아가는 한쪽 다리를 못 쓰는 노인에게 의탁된다. 동냥하다가 엿본 청자가마에 흥미를 느낀 목이는 어쩌다 도공을 도울 수 있게 되면서 밥 동냥은 하지 않아도 된다.
흙과 땔감을 나르는 일이 무척 힘에 부치지만 도제(徒弟)로 입문할 날을 기다리면서 힘든 줄 모른다. 도공 민(閔)씨는 상감기법 개발에 애썼고 마침내 성공한 새 청자를 목이가 개성으로 가져가 참신한 것을 고대하는 고려 왕실의 관심을 끌기에 이른다. 도공 일은 아들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는데도 아들 형규가 일찍 죽어 무자식이던 민씨는 감복한 나머지 목이를 입양해 형필이라 이름짓고 가업을 잇게 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민 영감이 만든 것이라고 작가가 설정한 청자는 간송미술관 수장 ‘청자상감 학무늬 매병’이다. 이쯤 되면 그가 내력 불명의 아이 이름을 형필이라 한 까닭을 알 만하다. 청자 등 빼어난 우리 문화재를 지켜준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1906∼1962)을 기리자는 뜻이다.
전형필이 누구인가. 망국(亡國) 탓에 외면되고 흩어지던 우리 문화재를 모은다고 엄청난 가산을 쏟아부었다. 그의 수집 행각은 애국운동의 일환이었다. 수많은 국보 및 보물급을 모았던 수집 열정은 그 자체로 ‘인간 국보’였다(이흥우의 ‘사람의 향기’·1987).
청자가마 경영이 세습제였다고 작가가 설정한 것은 조선 중엽인 1543년에 제정된 법제를 유추해서 소급 적용한 구성이라 한다. 그 설정대로 과연 고려 때도 그랬을까. 내가 살펴본 전문서적(윤용이의 ‘아름다운 우리 도자기’·1996, 정양모의 ‘한국의 도자기’·1991)에는 조선시대의 그 법제에 대한 언급이 없다.
전문적 언급이 없으니 법 제정의 배경이 더욱 궁금하다. 청자 재현에 성공했다는 경기 이천시 해강요(海剛窯)의 당주(堂主)에 따르면, 도자 일이 막일이라 자식은 제발 잇지 말기를 옛 도공들이 바랐던 까닭에 이를 막고자 함이었다고 추정한다. 이를 뒷받침할 물증은 있다. 조선백자에 ‘어느 곳이 좋은 봄 부잣집인가, 눈앞의 고생 탓에 날마다 늙는 것뿐이라네(何處春深好 春深富貴家 眼前何所苦 唯若日西斜)’란 도공의 푸념이 시문(詩文)으로 적힌 접시가 있다.
그래서 생각인데, 작가 이름이 거의 전해지지 않는 장인의 소산일지라도 청자나 백자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논평하자면 그걸 만들던 사람들의 생활상에 대한 규명도 곁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옛 도자는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숭상하고, 그걸 만든 사람에 대해 무심했다면 우리의 도자 연구는 아직 초보단계란 말이다.
지금이라도 고금(古今)의 도공들이 처했던 삶의 질을 따져봐야 한다. 나라는 전통 도자의 빼어남에 착안하여 경쟁력 있는 문화산업으로 육성하려 하고, 옛 가마터가 있던 지방마다 특화산업으로 내세운 끝에 경기 이천, 여주 일대 대학에는 도자기학과가 여럿이고 도예고교까지 설립됐다. 하지만 전망이 흐린 3D 업종으로 여겨져 졸업생이 현업에 취업하는 경우는 아주 적다. 예나 지금이나 도공 신세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도자산업이 융성하자면 무엇보다 사람이 주목받아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도예가가 스타로 ‘뜨지’ 못한 데는 정부정책의 일관성의 결여 탓도 있다. 진작 지정됐어야 함에도 아직 한 점도 국보나 보물 반열에 오르지 못한 조선시대 목기(木器)는 전통을 잇는다며 소목(小木) 인간문화재 지정이 10건에 달하지만, 지정 문화재 가운데 상당수를 차지하는 도자기 쪽 인간문화재는 1건이 고작이다. 문화재 정책이 들쭉날쭉한 끝에 도자 쪽에 대한 사회적 배려가 인색했다는 말이다.
린다 수 박은 10대에 한국을 잠시 다녀갔을 뿐인데도 모국 문화재 내력에 대한 깊은 탐구로 어른들이 읽어도 감동적인 아동문학을 만들어 놓았다. 빛나는 문화전통에는 역시 사람이 있었음을 일깨워 준 시각이 고맙다.
김형국 서울대교수·도시계획학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