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명재/현대상선 ´뒤늦은 약속´

  • 입력 2002년 12월 13일 18시 39분


“제2의 창업을 한다는 각오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현대상선 주주들은 12일 이 회사 노정익 사장으로부터 날아온 편지 한 통에 잠시 즐거웠을 것이다. 몇 년간 어려운 처지에 놓였던 이 회사가 최근 고비를 넘기고 경영사정이 좋아지고 있는 터에 사장의 ‘새 출발’ 다짐은 한결 믿음직했을 법하다. 게다가 노 사장은 그동안 주주들이 항상 불안해했던 부분에 대해 분명히 선을 그었다.

“앞으로는 현대 계열사에 대한 지주회사 역할을 하지 않겠습니다.”

주주들은 노 사장이나 현대상선의 굳은 약속이 지켜질 것인지 기대해볼 것이다.

그러나 현대상선의 ‘과거’를 돌아보면 장담키 어렵다. 현대상선은 한국 기업 풍토에서 최악의 고질병인 오너 경영의 폐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회사이기 때문이다. 과거 20여년간 한번도 적자를 내본 적이 없던 우량회사가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부실회사로 전락했던 건 무엇보다 오너 경영의 굴레 때문이었다.

회사 사업내용과는 별 관련 없는 회사가 대주주가 같은 ‘형제회사’라며 “돈 잘 버는 회사니 좀 도와달라”고 손을 벌려올 때 현대상선은 냉철한 경영 논리로 판단하지 못했다. 오너의 무리한 요구에 반발하다가 전문경영인(김충식 전 사장)이 밀려나기도 했다. 무엇보다 우선한 것은 대주주의 말 한마디였다. 결국 부실회사들 뒤치다꺼리하다가 회사는 만신창이가 됐다.

정치권에서 제기한 대북 비밀 지원설에 대해서도 여전히 속시원하게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기업은 이제 간신히 살아났지만 대가는 혹독했다. 알짜 사업인 차 운송선 부문을 팔고 많은 직원들을 내보내야 했다.

‘독립경영’ 선언은 시련 뒤의 새로운 포부다. 그만큼 절실한 의지가 담긴 것으로 믿고 싶다.

문제는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이다. 그동안에도 말로는 그러지 않는다고 하면서 계열사 지원을 해온 전력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결국 관건은 주주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대주주의 입김으로부터의 실질적인 ‘독립의지’다. 그것이 이번 선언이 얄팍한 ‘화장술’에 그치지 않는 길이다.

이명재기자 경제부 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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