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수를 던져서 웃는 사람도 있지만 좌절한 사람들은 “세상일이 도무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며 화로 들끓는다. 누군가는 ‘화는 우리를 피 토하게 하고 죽게 할 수 있다’(틱낫한)고 달랜다. 또 누군가는 화 내지 않는 사람에게는 발전도 없다며 ‘군자는 크게 노한다’(공자)고 부추긴다.
밖으로 터뜨리든, 속으로 참고 삭이든 나를 태우고야 마는 화(火).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 화 나면 달라지는 몸
화의 생리적 표현은 몸 전체 근육의 긴장이다. 교감신경의 흥분으로 동공이 확대되고 얼굴 표정은 딱딱하게 굳으며 호흡은 얕아지고 빨라진다. 근육이 긴장하는 것은 원시 인류 출현 이래의 공통적인 분노반응.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는 대상과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판단해서 혈액이 근육으로 몰리는 것이다. 근육으로 피가 몰리면 내장 기능은 저하된다. 화가 나면 소화가 잘 안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화에 가장 치명적인 내장기관은 심장이다. 최근 성균관대 의대 삼성서울병원 심장혈관센터 권현철 교수팀은 ‘화병이 생기면 심장이 멈춰 돌연사할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환자들이 심장동맥에 이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급성 심근경색증과 비슷한 심장기능 저하, 가슴통증 등을 호소했던 것.
학자들 사이에서는 화와 심장질환, 고혈압과의 관계에 대해서 ‘터뜨리는 것이 낫다’ ‘그래도 삭이는 것이 덜 위험하다’는 의견이 엇갈린다. 98년 미국 미시간대학(앤아버)에서 핀란드 출신의 중년남성 537명을 4년간 추적조사한 결과는 ‘양쪽이 똑같이 위험하다’는 것.
조사 시작 시점에는 모두 정상혈압이었지만 4년 후 104명이 고혈압으로 진행됐다. 술, 담배를 좋아하는지 부모에게 고혈압 병력이 있었는지 등을 따져본 결과 다른 요인보다는 화를 터뜨리거나(Anger-out) 끙끙거리며 속으로 삭이는(Anger-in) 것이 고혈압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발견했다. 양쪽 모두 화를 내거나 삭이는 지수가 1씩 올라갈 때마다 고혈압 발병 가능성이 12%씩 커졌다. 이는 화를 조절할 줄 아는(anger-controlled) 사람들의 2배 수치였다.
화가 나면 소화기능은 저하되는 데도 불구하고 식욕은 왕성해지는 경우가 있다. 분노의 신체적 반응으로 코티졸이라는 호르몬 분비량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강북삼성병원 박용우 교수(비만클리닉)는 “인위적으로 조사대상집단에 스트레스를 준 뒤 식사하는 모습을 관찰해 보니 코티졸의 영향으로 평소보다 많이 먹는 것은 물론이고 유난히 단 것, 기름기 많은 것을 찾았다는 실험 보고사례가 있다”고 말했다. 코티졸은 흡수된 지방을 복부쪽에 축적하도록 유도하는 경향마저 있다. ‘화 나면 먹어서 푸는’ 사람들이 치러야 할 대가는 만만치 않다.
● 근육을 풀어라
화가 났을 때 가장 두드러지는 신체 반응이 근육의 긴장인 만큼 근육을 이완하는 것이 최선의 ‘비상대책’이다. 원시인들은 필사적으로 도망가거나 자신을 위협한 존재와 소리지르며 싸움으로써 긴장된 근육을 ‘썼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근육긴장을 풀지 못한 채 사무실 의자에 앉아 이성으로 화를 억누르다보니 ‘뒷목이 뻣뻣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땀을 흘리면 근육은 이완된다. 산책 달리기 샤워 목욕 등이 손쉬운 긴장해소법이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여행도 권할 만하다. 한의학에서는 기공의 전통적인 육자결 동작도 추천한다(그림).
경희대 한방병원 김종우 교수(화병 클리닉)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화(스트레스)를 분산하라”고 권한다. “동일한 스트레스가 반복되는 것이 심각하다. 집에서 아이와 씨름하느라 스트레스가 쌓인 주부가 자신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영어학원에 다닌다고 하자. 학원에서 수업 좇아가는 게 힘들어 또 스트레스가 쌓인다고 해도 하루종일 아이하고만 씨름하는 것보다는 낫다.”
김 교수는 취미를 고를 때도 동일한 패턴과 수준이 반복되는 것은 피하라고 권한다. 마라톤이든 골프든 학습을 통해 발전하고 단계변화가 있는 취미생활이 스트레스 해소에 더 효과적이라는 설명이다.
● 화가 내게로 오면 그대로 멈춰라
리더십교육 전문가인 김경섭 대표(한국리더십센터)는 최고경영자(CEO)나 간부사원들에게 “화를 내는 것보다는 화를 컨트롤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진짜 카리스마”라고 강조한다. CEO는 안팎으로부터 끊임없이 감정 상하는 자극과 도전을 받는데 이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자질이 평가된다는 것.
치미는 화를 조절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김 대표가 조언하는 기법이 이른바 ‘S(Stop) T(Think) C(Choose)’다. 화가 났으면 잠깐 동안이라도 모든 판단을 멈추고 그 뒤에 생각해서 어떻게 할 지를 결정하고 지시하라는 것이다.
화가 난 상태에서는 ‘일단 하던 것을 멈추라’는 것은 정신과의사 등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조언이다. 실제로 ‘화 나면 눈에 보이는 게 없기’ 십상이다. 사고능력을 관장하는 대뇌피질의 기능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화를 내는 사람은 분노의 이유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착각이다. 화 난 순간에는 그 이유를 이성적으로 규명하기 어렵다. 화풀이의 대상이 됐거나 달래야 하는 처지의 사람도 화가 나 있는 상태의 사람에게 “왜”를 묻는 것은 어리석다.
화는 감정이다. 감정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잠깐 산책이라도 하면 극한의 순간은 넘긴다.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자신의 화를 ‘들여다보는 것’은 이때부터다.
“왜 화가 났는지,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를 찬찬히 생각해 보라. 그 이유가 합당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 화를 다스리는 방법이다.”(이시형 사회정신건강연구소 소장·신경정신과 전문의)
그러나 이유를 파악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한국인들은 곧잘 ‘미안하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 영어에 ‘I’m sorry’라는 말은 있지만 ‘I think sorry’라는 말은 없다. 미안한 것은 감정이다. 한국인들의 경우 이처럼 감정과 사고가 뒤섞여있어 양자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이시형 소장)
감정과 사고의 미분화는 화의 이유를 분명히 보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많은 정신과의사들은 환자들에게 “지난 1주일간 무엇을 느꼈는지를 써보라”고 주문한다. 처음에는 감정 대신 “△△를 생각했다”로 답안을 메우기 일쑤다. 점차 화, 슬픔, 두려움 등이 생각과는 다른 감정이라는 것을 분리할 수 있게 된다.
50년째 사제생활을 하고 있는 천주교의 두봉 주교(전 안동교구장)는 ‘화 낸 죄’를 고백성사하는 신도들에게 늘 “화 자체는 죄가 아니다”라고 말해왔다.
“화라는 느낌에는 윤리성이 없다. 중요한 것은 그 감정을 갖게 한 이유를 분석하는 것이다.”
● 화를 맞는 법
△화의 뿌리에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는 불만이 있다. 100%를 바라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을 50%의 확률을 갖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잊고 있지 않은가.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게 거절하는 기술을 익혀 두어야 한다. 미숙한 자기주장은 화 내는 것으로 표현되며 상대마저 화나게 한다.(이시형 소장)
△화를 내는 사람에게 필요한 도움은 ‘경청’이다. 성직자라 할지라도 들어줄 뿐이지 길을 일러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에 빠진 사람 스스로 마음껏 이야기하면서 깨닫지 못했던 이런 저런 점들을 발견하고 답을 얻도록 기다려 주는 것이다.(두봉 주교)
△화를 자각한다는 것은 그것의 실체를 끌어안는 것이다. 맞서 싸우거나 억누르는 게 아니다. 자각은 말하자면 우는 아기를 품에 안아서 달래는 어머니와도 같다. 우리 마음속의 화는 우리의 아기다. 보살펴야 할 자식이다.(틱낫한 스님의 책 ‘화’ 중)
정은령기자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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