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포커스]증시 초대형 작전뒤엔 한국인 역외펀드 있다

  • 입력 2002년 12월 26일 18시 23분



인구 7만5000명인 말레이시아의 섬 도시 라부안에는 2300여개의 회사가 있다.

이 가운데 2000여개는 사무실과 직원 없이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회사다. 63만원만 들이면 자본금 3억원짜리 회사의 설립 등기를 낼 수 있다. 하루 만에 승인이 나고 법인세는 없다.

한국인들은 라부안 역외금융서비스공사(LOFSA)의 최대고객으로 알려져 있다.

세제 혜택은 덜하지만 홍콩도 한국인 투자자금의 대기처로 유명하다. 1만달러만 주면 싹싹한 브로커들이 하룻밤 만에 회사를 ‘뚝딱’ 만들어준다.

▽검은 머리 외국인과 작전〓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한국 증시에 투자하는 외국인 중 말레이시아 아일랜드 룩셈부르크 등 조세회피지역과 홍콩 국적 외국인의 비중은 10% 남짓.

매매 비중은 이보다 높은 15∼30%에 이른다. 미국 영국 국적의 외국인들보다 훨씬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

증권가에서는 이들 지역 출신 외국인 중 상당수는 한국인이 만든 역외(域外)펀드, 즉 ‘검은 머리 외국인’으로 본다. 17일 1700억원대의 미수 사고를 일으킨 LG투자증권 홍콩법인의 기관 계좌도 검은 머리 외국인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이런 추정이 사실로 밝혀지면 이번 사건은 검은 머리 외국인이 주식 계좌로 시세조종에 나선 최초 사례가 된다.

역외펀드는 지금까진 해외 전환사채(CB)나 신주인수권부사채(BW)의 경유지로서 한국 기업의 검은 거래와 연루돼왔다. 한국 기업이 발행한 해외 CB나 BW를 수수료를 받고 잠깐 떠안고 있다가 되팔든가, 사채를 주식으로 전환해 막대한 시세차익을 얻는 수법이다.

‘이용호 게이트’로 불리는 삼애인더스의 주가조작, ‘무서운 아이들’ 리타워텍의 기업사냥 등 증시를 떠들썩하게 했던 초대형 작전에는 ‘약방의 감초’처럼 역외펀드가 끼어있었다.

역외펀드를 이용한 떳떳하지 못한 거래의 원조는 대기업들이다. 97년 1월 삼성자동차의 아일랜드 투자회사로부터 2500억원 투자 유치, 99년 6월 대우의 서울 힐튼호텔 해외매각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외국인에 대한 편견이 외국인의 영향력을 키운다〓외환위기 이후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 경제의 심판자이자 구세주로 행세하면서 부작용이 잇따랐다.

파산 위기에 몰린 기업들은 허수아비 외국인을 내세운 외자유치를 승부수로 던졌다. ‘외국인들이 투자할 정도로 좋은 회사’라는 선전이 먹혀들면서 주가가 솟구치고 유상증자를 통해 회생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조차 이름이 생소한 자그마한 코스닥 기업들도 앞다퉈 해외 CB나 BW 발행을 재료로 주가를 끌어올렸다.

채권거래를 통한 이런 노골적인 작전은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하지만 불순한 외국인들의 ‘합법적이고도 일상적인 작전’은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 투자자들의 외국인에 대한 편견을 활용해 손쉽게 돈을 벌고 있다.

외국인에 대한 대표적인 편견이 ‘외국인들은 현물과 선물시장을 현란하게 넘나들면서 서로 짜고 한국 증시를 주무른다’는 억측.

외국통으로 알려진 리캐피탈투자자문 이남우 대표는 “외국인들은 국적 성격 투자방식이 제각각이며 현물과 선물을 동시에 대량 거래하는 투자자도 별로 없다”고 말한다.

외국인이 순매수를 많이 하면 ‘바이 코리아(Buy Korea) 아니냐’며 잔뜩 기대하고 외국인이 좀 팔면 ‘셀 코리아(Sell Korea) 아니냐’고 수군거리는 투자자들의 자세도 투기적인 외국인들의 기를 살려주는 잘못된 태도라는 지적.

미래에셋증권 이정호 투자전략팀장은 “2000년 이후 외국인 투자의 중심은 국가별 분산투자에서 산업별 분산투자로 옮겨졌다”고 말했다.

▽감독의 사각지대〓외국인 투자자들은 금감원에 등록을 해야만 한국 종목에 투자할 수 있다. 하지만 등록 과정에서 이들의 실체는 전혀 파악되지 않는다.

금감원 관계자는 “등록 서류가 위조됐다 하더라도 이를 일일이 밝힐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한국인이 외국인에게 수수료를 주고 차명 계좌를 만드는 것은 더더욱 적발하기 어렵다.

외국인이 부당한 거래를 했다는 확실한 혐의를 잡았어도 당사자가 조사에 불응하면 그만이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은 현지 법원에서 소송을 하는 것뿐이다.

금감원 정은윤 주식시장팀장은 “국제간 금융거래와 관련해 한국이 공식적인 수사 공조협약을 맺은 나라가 없으며 이는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다만 국제통화기금(IMF)이 9·11테러 사건 이후 자금세탁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는 국제협력프로그램을 제기했으나 현재로선 원칙적인 합의 외에 진전이 없다.

이처럼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감시나 감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외국인 관련 작전을 줄이는 것은 한국 투자자와 한국 시장의 자정능력에 달려있다는 지적이다.

이철용기자 lc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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