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제기 과정도 석연찮다. 한나라당이 압승한 6월 지방선거와 8월 재·보궐선거 때도 전자개표 방식이 이뤄졌지만 그 때는 아무런 이의 제기가 없었다. 이번 대선에서 개표소마다 8명까지 당 참관인을 둘 수 있었는데도 한나라당은 1명 정도씩만 두었다. 전자개표 방식에 별 문제점이 없다고 판단했기에 그랬을 것이다. 실제로 개표 당시엔 개표 부정 얘기가 거의 나오지 않았고, 이회창 후보는 개표 직후 공개적으로 패배를 인정했다.
재검표를 하면 물론 부분적인 오류는 드러날 수 있다. 하지만 조직적인 개표 부정이나 당락을 뒤바꿀 만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는 한나라당 관계자들조차 기대하지 않는 분위기다. 그런데도 소송을 제기하고 나선 것은 아무래도 동기가 순수해 보이지 않는다. 한나라당 소장 의원들의 주장대로 당 지도부가 대선 패배 책임을 덮어버리고 지도부 총사퇴를 비롯한 거센 쇄신 요구를 비켜가기 위해 소송을 냈다면 그것은 당당하지 못한 일이다.
정치권이 마땅히 변해야 할 시기에 변하지 않는 것은 지지자들에 대한 직무유기다. 미래를 위한 준비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패배보다 비참한 것은 그 이후의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패배주의’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이제라도 민의를 거스르지 말고 과감히 내부 쇄신에 나섬으로써 강한 야당을 재구축해야 한다. 그것이 절반에 가까운 표를 준 지지자들의 허탈감을 달래고 다시 희망을 일구는 길이자 국민에 대한 진정한 도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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