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원장은 정치인들의 금연을 특히 촉구한다. 사회 지도층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실제 그는 많은 정치인에게 담배를 끊을 것을 권했고 실행에 옮기도록 했다.
● 에피소드 하나
2001년 9월 21일 서울발 광주행 아시아나 항공기 안. 금연 특강을 위해 광주로 가던 박 원장은 우연히 옆좌석에 앉은 노무현 대통령당선자(당시 민주당 최고위원)를 발견했다. 박 원장은 ‘몸에 밴’ 질문을 시작했다.
“담배를 피우세요?”(박 원장)
“예. 피우고 있습니다.”(노 당선자)
“(담배의 해악에 대해 20여분간 설명한 뒤) 앞으로 큰 일을 하려면 건강하셔야죠. 그러기 위해선 담배를 끊으셔야 합니다.”(박 원장)
그로부터 1개월 정도 지난 뒤 다시 우연한 만남. 집요하게 담배 얘기가 이어졌다.
“담배 계속 피우시나요?”(박 원장)
(금연패치를 붙인 팔을 내밀고 웃으며) “자존심 상해 끊었습니다.”(노당선자)
● 에피소드 둘
2001년 1월 31일 김대중 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하던 때였다. 박 원장은 “국민의 건강을 해치는 담배에서 세금을 걷어 국가재정에 이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담뱃값이 영국, 노르웨이 등에 비해 겨우 6분의 1 수준밖에 안돼 학생들이 껌을 사먹듯 담배를 사서 피운다”고 보고했다. 박 원장은 또 “지도층이 솔선수범해야 하며 이를 위해 청와대 경내와 입법,사법, 행정부 수장(首長)이 있는 곳은 금연구역으로 지정하고 고위 공직자의 흡연량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에피소드 셋
2000년 9월 30일. 한광옥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을 만나는 자리였다. 박 원장은 청와대 전 지역을 금연구역으로 지정해 줄 것을 건의했다. 그리고 금연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다. 박 원장은 이후 한 비서실장이 3시간 만에 사무실에 있던 재떨이를 모두 치우고 담배를 끊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지난 한 해 동안 박 원장의 금연 캠페인은 여러 곳에서 빛을 발했다. 폐암으로 사망한 고(故) 이주일씨가 지난해 초 금연 홍보대사로 나서 금연열풍을 일으킨 데에도 박 원장의 공이 컸다. 당시 이씨는 국립암센터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금연운동본부의 부탁을 받은 박원장이 이씨의 주치의였던 이진수부속병원장과 함께 정씨를 설득해 TV 앞으로 끌어낸 것.
지난해 9월에는 청소년 비흡연자를 대학입시에서 우대하자고 각 대학에 제안했다. 이 방안에 대해서는 현재 숙명여대, 이화여대, 성균관대 등 8개 대학이 타당성을 검토 중이다.
지난해 12월 이후 한국방송공사(KBS)가 내보내는 드라마에서는 흡연장면을 볼 수 없다. 또 서울방송(SBS)의 드라마에서는 흡연장면이 흐리게 처리된다. 박 원장이 지난해 10월 초 각 방송사를 돌면서 흡연장면 자제를 요청하고 금연강연을 한 덕분이다.
사실 박 원장의 전공은 폐암이 아니다. 그는 외국에서도 알아주는 대장암 분야의 권위자. 그런 그가 ‘금연 전도사’로 나선 것은 국립암센터의 원장을 맡게 되면서부터다.
“담배가 나쁜 것은 알았지만 그렇게 심각한 줄은 몰랐습니다. 모든 암이 대부분 흡연과 직간접적으로 깊은 연관이 있을 정도니까요. 암센터에서 흡연의 해악을 알리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라 생각돼 팔 걷고 나서게 됐습니다.”
박 원장의 꿈은 담배 판매 자체가 금지돼 전 국민의 금연이 이뤄지는 것이다. 문제는 이 꿈이 실현성이 없다는 것. 박 원장은 그 대안으로 담뱃값의 대폭 인상과 건강펀드의 조성을 주장했다. 박 원장은 “담뱃 값을 1만원선으로 올려 이를 통해 거둔 수입에서 건강펀드를 조성해 흡연자를 대상으로 건강을 관리해 주고 금연예방활동에 쓰는 게 바람직하다”며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직장인 금연에 대해서는 최고경영자(CEO)의 ‘발상의 전환’이 시급하다는 게 박 원장의 생각이다. 복리후생과 임금인상보다 더 중요한 게 직원들의 건강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사장님들. 직원들이 가혹하다고 볼멘 소리를 하더라도 금연을 강제적으로 명령하세요. 직원들을 내 가족이라고 여긴다면 그들의 병을 막는 것은 사장님들의 의무입니다. 월급을 올려주고 복리후생을 좋게 해 준다고 해도 건강을 챙겨 주는 것만큼 좋은 새해 선물이 없으니까요.”
김상훈기자 corekim@donga.com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무조건 끊어라▼
국립암센터 박재갑 원장이 권하는 담배 끊는 요령은 좀 특이하다. ‘어떻게 어떻게 하라’는 식이 아니다. ‘흡연은 병이므로 병에 대해 바로 알고 무조건 끊어라’는 식이다.
박 원장은 “당신이 만약 흡연으로 인해 내일 죽는다는 사실을 안다면 오늘 담배를 피우겠느냐”고 묻는다.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그저 기호품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심각한 고민 없이 흡연을 하고 있으며 그게 담배를 끊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라는 것. 박 원장이 말하는 담배를 끊어야 하는 이유를 소개한다.
▽담배는 독극물이다=담배를 기호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 담배는 69종의 발암성 물질과 4000종 이상의 화학물질이 들어있는 독극물로, 마약으로 분류된 마리화나보다 중독성이 더 강한 물질이다. 담배에는 특히 사약의 주성분인 ‘비소’, 사형가스로 쓰이는 ‘청산가리’, 페인트 제거제인 ‘아세톤’, 살충제로 쓰이는 ‘DDT’ 등 유해중금속과 약물이 함유돼 있다. 이 사실을 알고도 담배를 피우겠는가.
▽흡연은 병이다=담배를 피우는 순간부터 바로 환자다. 또한 흡연에 따른 당뇨병, 고혈압 등의 질병이 유발될 가능성이 크므로 환자 중에서도 중환자이다. 따라서 반드시 금연클리닉에서 병을 고쳐야 한다. 국내에서 ‘흡연환자’ 사망자수는 연간 1만7700여명으로,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때 숨진 502명의 35배에 이르는 수치다. 즉 삼풍참사가 10일마다 되풀이되고 있는 셈. 만성질환자가 되고 싶은가.
▽흡연은 가족의 고통이다=간접흡연만 해도 가족은 25%의 흡연을 하는 것과 같은 피해를 보게 돼 질병의 위험에 놓이게 한다. 또한 부모의 흡연장면은 자녀들을 흡연의 유혹에 노출시키기도 한다. 만약 흡연으로 인해 폐암 등이 발병할 경우 가족 모두의 극심한 고통을 동반한다. 가족을 사랑한다면 반드시 금연하라.
김상훈기자 core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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