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동안 내가 행한 일은 그것이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무엇보다 나의 자유의지로 행한 것이다. 나는 내 안에서 자유로웠다고 독자들에게 고백한다.”
카사노바(1725∼1798)는 회고록 ‘나의 인생 이야기’의 첫 부분을 이렇게 시작했다. 자유로이 성과 쾌락에 탐닉했던 이 희대의 바람둥이를 부러워하고 시기하는 많은 사람들은 200여 년 동안 그를 문학 영화 연극 그림으로 재현해 왔다.
하지만 고서적상인 저자는 고서더미 속에서 지적 로맨티스트이자 문화사업가로서의 카사노바를 재발견하고 그의 여정을 따라 여행을 떠난다. 저자는 카사노바가 머물렀던 도시에서 그의 유적과 유작을 만나고 그곳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카사노바를 끄집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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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자들을 미친 듯이 사랑했다. 그러나 여인과 자유 중 하나를 고르자면 난 자유를 택할 것이다.”
저자는 카사노바가 성직자의 길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감각의 순례’의 길로 들어간 베네치아와 로마에서의 광기 어린 사랑을 이야기하며, “카사노바는 여인들의 한 가지 장점만 보고 그 속에 빠져든 남자”였다고 평가한다. 매 순간 만난 여인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이 때문에 여인들은 훗날에도 이 남자를 원망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귀족으로 태어나지 못한 그는 자신의 재능을 활용해 상류사회에 들어가려 발버둥치면서도 상류사회의 방탕함을 비판하며 평등한 사회를 꿈꾸기도 했다. 성직자, 음악가, 희곡작가, 문화사업가였을 뿐 아니라 패션, 요리, 의술에까지 탁월한 감각을 가졌던 그는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자유’를 추구했다.
프랑스 혁명의 태동기에 살았던 카사노바는 자유 평등 사랑이라는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먼저 실천했다. 그러나 그는 계몽주의자인 볼테르의 이성주의를 비판했다. 볼테르가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봤던 데 반해 카사노바는 인간을 열정과 충동의 덩어리로 봤다.
“내가 평생 추구한 것은 감각의 즐거움이며, 나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나 카사노바도 세월을 이길 수는 없는 법. 60대에 접어든 카사노바는 쇠잔한 육체를 안고 프라하로 가서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말년을 정리했다.
“내 생의 마지막에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다. 그곳은 오직 도서관밖에 없다.”
그는 이곳에서 회고록을 비롯해 다방면의 저술을 연이어 완성한다. 40여 권이나 되는 저서를 남긴 그는 지적 열정이 강한 지식인으로 평가될 만하다. 그러나 모차르트와 괴테는 그들의 음악과 문학 뒤에 광적인 사랑을 가릴 수 있었던 데 반해, 불행히도 불후의 명작을 남기지 못한 카사노바의 지적인 면은 자신의 애정 행각 뒤에 가려졌다.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던 카사노바는 73세로 세상을 떠나며 유언 한 마디로 자신의 삶을 정리했다.
“나는 철학자로서 살다가 크리스천으로서 죽는다.”
그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정리했든, 그의 다양한 삶 중 어느 면을 보는가는 후세인의 몫으로 남았다. ‘불행히도’ 분명한 것은 그의 화려한 애정행각이 아니었던들 ‘불후의 명작’도 남기지 못한 그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일은 없었으리라는 사실이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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