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한쪽은 시민단체가 특정 정파나 정치인을 지지하며 정치권에 깊이 들어가 정치세력화하는 길이다. 2002년 대선의 결과는 이 두 번째 길의 매력을 높였고, 그 길을 택하는 사람들의 사기를 높였다. 선거과정에서 노무현 당선자는 당 조직보다는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같은 개인 중심의 정치조직을 지속적 지지기반으로 삼았고, 매스컴과 인터넷을 이용해 유권자에게 호소하고 시민사회와 직접적 연계를 맺는 데 주력했다.
▼더이상 정치인 지지모임은 안돼▼
개인중심 조직, 매스컴, 사이버매체, 시민단체가 대선과정에서 비중을 높인 반면,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 기존의 주요 정당조직은 공히 상대적 힘의 상실감을 느꼈다. 이런 선거상황은 많은 시민단체들로 하여금 보다 큰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도록 동기를 부여했을 것이다. 정당의 위축으로 인한 힘의 공백을 시민단체가 정치세력화해서 메워야 한다는 주장이 널리 공감을 얻을 만도 하다.
여기에 덧붙여 이번 노사모의 존속 결정과 그에 대한 노 당선자의 입장은 자칫 개인중심의 정치조직과 시민단체 간의 구분을 애매하게 함으로써 시민단체의 정치화를 더욱 장려하는 메시지를 보낼 것 같아 걱정이 든다. 바로 노 당선자의 입에서 나온 “노사모가 시야를 넓히면 할 일이 많다” “제2, 제3의 노무현을 찾아야 한다”는 주문은 노사모가 시민단체로 거듭난 후 정치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노사모가 일반 시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형성된 단체라는 데는 이의를 달 수 없지만, 특정 정치인 개인에 대한 지지가 근본목표인 조직이 시민단체로 분류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간 의견이 분분했다. 만약 노사모가 명칭을 바꿔 정치적 활동범위를 넓히며 시민단체로서의 성격을 강화한다면, 다른 시민단체들도 보다 적극적으로 정치권에 참여하고자 하는 밴드왜건(bandwagon) 효과가 있을 것이다.
노사모가 시민단체로 발전하고 더 지속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물론 부정적으로만 볼 순 없다. 일반적으로 말해, 시민단체는 낡은 정치에 참신한 쟁점과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간과된 사안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새 얼굴을 충원함으로써 새로운 정치변화를 유도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할 수 있다. 근래 한국정치가 조금씩이나마 변화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시민단체들의 노력 덕분이다. 탈산업사회를 맞아 정당이 시대적 적실성을 잃고 있는 가운데 시민단체의 정치화는 어쩔 수 없는 조류로도 보인다.
그러나 정치적 관심, 참여, 비판은 꼭 특정 정파나 정치인과의 친소관계를 수반할 필요는 없다. 중립적 외부감시자로서 정치권에 균형 잡힌 견제를 가하는 것이야말로 더 중요한 정치참여다. 문제는 노사모가 새 이름하에 언론개혁, 동서화합, 정치개혁이라는 3대 목표를 추구한다 해도 애초의 출범배경 때문에 순수한 중립성을 표방하기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이 단체는 적어도 많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여전히 2002년 대선과정에서 활약한 노사모로 남을 것이다.
▼중립적 외부감시역 맡아야▼
정치권은 나름대로 정당개혁을 통해 정책대결을 시도하고, 시민단체는 정치권을 철저하게 감시해야 한다. 시민단체가 정파성을 띤다면 스스로 정치권의 일부가 되어 공정한 감시 주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 자칫 선동정치의 도구가 될 위험성도 있다. 대의민주주의의 제도적 토대를 침식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날카로운 견제의 힘을 발휘하는 시민단체상(像)을 위해서도, 노사모의 시민단체화는 우려를 자아낸다.
임성호 경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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