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임채청/대통령의 힘

  • 입력 2003년 1월 21일 18시 44분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엔 대통령의 권한이 참 크다고 느꼈다.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뭘 하려고 하면 여기저기서 이것은 곤란하고 저것은 안 된다며 제동을 걸었다. 대통령의 권한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6개월도 채 걸리지 않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재임 중에 한 말이다.

‘권력의 백화점’에 갓 들어선 새 집권세력도 이것저것 마구 ‘사들이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주어진 ‘돈’이 5년의 임기와 과반수에 크게 못 미치는 의석과 48.9%의 대선 지지율뿐임을 잊고 있을지도 모른다. 역대 정권이 한계를 망각하고 과욕을 부리다 뒤늦게 시급하지 않은 일이나 감당할 수 없는 일까지 벌인 것을 후회한 사례는 많다. 현 정부 초기 의욕적으로 추진한 ‘제2의 건국운동’만 해도 지금 어떻게 됐는지 국민은 관심조차 없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의 일화. 의회 연설을 위해 서둘러 가다 신호위반으로 교통경찰관에게 적발된 처칠은 연설 후 경찰책임자를 불러 자신의 직분에 충실한 교통경찰관을 특진시키라고 지시했다. 경찰책임자가 “법에 그런 규정이 없다”고 거부하자 처칠은 “오늘은 경찰에 두 번이나 당하는군” 하며 만족해했다.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나라에선 이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 대통령이 신호위반으로 적발될 리도 없고, 경찰책임자가 대통령 지시를 거부할 리도 없으며, 대통령이 경찰에 당하고 만족해 할 리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얼마 전만 해도 버젓한 기업의 사장이 청와대 청소담당직원에게 수억원을 쥐어주기까지 한 한국 아닌가. 대통령의 힘이 세기 때문에 청와대 기능직까지도 분수에 넘친 ‘혜택’을 입은 셈이다.

그렇다면 YS의 깨달음은 무엇일까. 대통령의 권한행사라는 것도 법과 제도와 여론의 제약으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음을 깨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인은 권력의 힘에 대해 아직도 실재 이상으로 중압감을 느낀다. 권력운용이 제대로 법과 제도의 틀 안에서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초법 탈법 편법이 존재하는 한 권력형 비리는 자연발생적인 현상이다.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권력에 대한 제약은 늘고 권력의 힘은 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개혁이다. 다만 그런 개혁을 한다는 이유로 권력은 더 강한 힘을 원하는 게 개혁의 역설이자 함정이긴 하지만.

권력의 일탈과 타락은 집권세력과 국민의 이율배반적인 인식과도 관계가 있다. 집권세력은 여론이 좋을 때는 힘을 키우려 하고, 여론이 나쁠 때는 힘에 기대려 하는데 그것이 불행의 씨앗이 되곤 한다. 또한 일반인은 힘있는 대통령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힘의 행사에는 거부감을 느끼는데 그것이 집권세력의 착각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노무현 대통령당선자는 하고 싶은 일이나 해야 할 일보다도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먼저 가려야 힘에 대한 유혹과 집착을 버리고 성공적인 국정수행을 기약할 수 있다. 그러나 6개월은 너무 늦다. 취임 전에 선을 긋지 않으면 안 된다. 지난 주말 TV토론에서 그가 “대통령이 하는 일에도 한계가 있다”고 말한 것을 그런 신호로 받아들이고 싶다.

임채청 논설위원 cc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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