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청와대 고위 외교안보 관계자는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혀 걱정할 것 없다. 이번 정상회담 결과는 깜짝 놀랄 정도로 만족스러울 것이다. 김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을 받은 유일한 현직 대통령이다. 모든 지도자가 김 대통령을 만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김 대통령이 말하면 경청하게 돼 있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대북 대화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김 대통령에 대해 부시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의구심(스켑티시즘)을 갖고 있다”고 말해 뚜렷한 의견 차이를 보였다.
북-미 대화는 그 후 지금까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고 남북관계도 한동안 뒷걸음질쳤다. 한미정상회담 직후인 3월 13일 서울에서 열기로 했던 남북장관급회담이 북한의 돌연한 불참으로 무산됐다. 2일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2001년 3월 워싱턴 한미정상회담이 대북정책을 둘러싼 한미 갈등의 시발점”이라고 보도한 것도 이 때문이다.
3월 한미정상회담 후 청와대 내에서도 뒤늦게 “부시 행정부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가 성급했다. 자만했다”는 자성론이 나왔다.
2001년 10월 19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열린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재회한 부시 대통령에 대해 김 대통령이 보여준 태도는 그런 자성론과 무관치 않은 듯했다.
김 대통령은 이날 정상회담 모두발언 전부를 부시 대통령의 대(對)테러전쟁을 칭찬하는 데 할애했다. 대북 문제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9·11테러 후 탁월한 영도력과 현명함으로 미국민들을 단합시키고 테러근절을 위한 전쟁에 국제 협력을 얻어낸 리더십에 존경을 표한다”는 요지였다.
기자는 부시 대통령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과공(過恭)이 아니냐는 질문에 현장에 있던 한 외교관은 “말로써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하고 그로써 실리를 얻을 수 있다면 그런 말은 일백번이라도 해야 한다. 그게 외교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 회담 후 미국은 북한을 이라크와 같은 테러 지원국으로 취급하던 시각을 바꿔 “북한은 이라크와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하며 대북 대화의 여지를 열어 놓았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당선자와 부시 대통령의 첫 만남이 3월 중에는 이뤄질 것 같다. 지금 노 당선자는 미국에 대해 자신감에 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한국 주도’와 ‘대미(對美) 자주’를 언급하고 있다. 그는 또 “북한 핵문제에 대한 미국의 여론이 이제 평화적인 해결로 돌아가고 있으며 미국이 뒷걸음질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고도 말하기도 했다.
한국 주도, 자주, 평화적 해결. 이런 것을 원치 않을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제관계에는 상대방이 있다. 우리만의 생각, 우리만의 주장을 내세울 경우 자칫 상대방을 자극해 실리를 잃을 수 있다.
자신감에 차 있다가 낭패를 봤던 2001년의 전철을 한번쯤 되새겨 볼 일이다.
윤승모 정치부 차장 ysmo@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