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에 다가서기/강영조 지음/264쪽 1만8000원 효형출판
풍경이란?
“대지의 투시 형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하여 인간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이미지 현상이다.”
다소 어려운 정의지만 ‘경관(景觀)공학’이라는 낯선 학문을 전공하는 저자(동아대 도시계획-조경학부 교수)가 말하려는 것은 “풍경은 자신과 눈앞의 세계가 만날 때 태어난다”는 것이다. 모든 인식이 그러하듯 풍경에 대한 인식도 결국 풍경과 ‘나’의 만남이다.
풍경과 인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저자는 풍경과 가장 감동적으로 만나는 길로 독자를 안내한다.
▽시각=겸재 정선(謙齋 鄭)만큼 조선 산수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또 있었을까? 그의 진경산수화에서 풍경을 보는 ‘시선’을 배울 수 있다. 그 산수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위치와 시선과 손짓을 보라는 것이다. ‘쌍계입암’에서 높이 솟은 암봉을 보는 ‘올려보기’, ‘용공동구’에서 직벽 끄트머리에 앉아 급류를 보는 ‘내려보기’, ‘단발령망금강산’에서 멀리 실루엣으로 보이는 금강산의 암봉을 보는 ‘바라보기’, ‘세검정’에서 정자를 둘러싼 경관을 보는 ‘둘러보기’…. 좋은 풍경이란 그 풍경을 보기에 적절한 장소(시점)와 그곳에서 그 풍경과 절묘한 관계를 맺는 시선에 의해 탄생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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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각=소리가 사라진 무성영화를 보면 소리가 현실의 생동감을 전달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소쇄원의 경치가/ 소쇄정에 알뜰히도 모였네/ 쳐다보면 시원한 바람 나부끼고/ 귓가에는 패옥(佩玉) 부딪는 소리.”(김인후·金麟厚의 ‘소쇄원·瀟灑園 48영’ 중 제1영)
“홈을 타고 샘줄기 흘러내리며/ 높낮은 대숲 아래 못을 이루네/ 높이서 떨어진 물줄기는 물방아를 돌리는데/ 온갖 물고기가 흩지어 노네.”(‘소쇄원 48영’ 중 제12영)
자연의 소리와 사람의 소리가 서로 어우러지는 협음을 즐길 줄 알았던 김인후는 소쇄원의 주인이었던 양산보(梁山甫)보다 소쇄원(전남 담양 소재)의 풍광을 더 잘 누릴 수 있었다.
▽후각=향기는 풍경이라는 물리적 세계와 그것을 보는 사람 사이를 이어준다. 숲의 나무 냄새, 갯가의 갯 냄새, 아침햇살의 청향….
“조촐히 선 게 어디 보통 꽃이랴/ 고운 자태는 멀리서 볼 만하고/ 향기는 골짜기를 가로질러 넘난다/ 방에 들이니 지란(芝蘭)보다 오히려 좋아.”(‘소쇄원 48영’ 중 제40영)
꽃 향기와 물 냄새 없이 정원을 느낄 수는 없고, 은은히 번지는 향내 없이 산사(山寺)를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후각은 자신이 지금 어떤 풍광 속에 잠겨 있음을 절절히 느끼게 해준다.
▽미각=고려의 수도 개성의 풍광을 노래한 ‘송도팔경’ 중에 이제현(李齊賢)의 ‘웅천에서의 계모임(熊川契飮)’이 있다. 웅천이라는 냇가에 모여 술을 마시고 풍류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이 풍류 자체가 하나의 절경이었다.
“사장(沙場) 머리에서 술병은 다 비웠고/ 해는 지려 하는데 맑은 물에 발을 씻고 나는 새 바라본다.”
‘계음’은 풍경 마니아의 모임이기도 하다. 계음의 장으로 풍광이 수려한 곳을 선택하고 음식을 즐기는 행위를 필수로 한 것은 산수 풍경의 체험이 사회적 관습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특히 풍광 속에서 제철 음식을 맛보는 것은 음식과 제철, 풍광과 사람, 그리고 사회가 결합되는 문화적 양식이다.
▽촉각=풍경이란 바람(風)과 햇빛(景)이다. 바람 햇빛과의 만남에서 가장 직접적인 통로는 촉각일 수밖에 없다.
“자목련이 흔들린다/ 바람이 왔나보다/ 바람이 왔기에/ 자목련이 흔들리는가보다/ (중략)/저렇게 자목련을 흔드는 저것이/ 바람이구나.”(김춘수의 ‘바람’)
직접 바람을 맞지 않아도 된다. 바람결에 휘어진 버들의 그림에서도 바람을 느낄 수 있다. 여름에 그늘이나 물이 시원하게 보이거나 겨울에 양지가 따뜻하게 보이는 것은 촉각과 시각이 결합된 ‘촉시적(觸視的) 체험’이다. 장미꽃을 직접 만지지 않아도 꽃잎은 보드랍고 가시는 날카롭게 느껴진다. 풍경을 온몸으로 확인하는 행위는 세계를 보다 실감 있게 체험하는 방법이다.
저자는 풍경과 오감과 사람이 만나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는 경지로 독자를 안내한다. 동이불화(同而不和), 어디에나 개성 없고 또 자기만을 드러내는 거대한 토목구조물이 들어서는 살풍경 속에서 다시 화이부동(和而不同),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되 서로가 잘 어우러지는 조화의 세상을 꿈꾼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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