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이 9단이 중반 무렵 역전 당했을 때는 ‘제아무리 이창호라도 이젠 졌구나’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김승준 7단=참고도를 보시죠. 흑 진영이었던 우상귀에서 뜻밖의 패가 나는 바람에 흑 필패의 국면입니다. 패가 나기 이전까지 흑이 15집 정도 앞선 바둑인데 신중하기로 소문난 이 9단이 상대의 흔들기에 걸려들었습니다. 후 7단의 바둑은 ‘후류’라고 불릴 정도로 이 9단 못지않게 침착한 바둑입니다. 이 대국에서도 중반전에 중앙 흑을 잡지 못하면 승부가 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차분히 기다렸다가 결국 우상귀에서 크게 한 건을 올렸습니다.
▽기자=백이 ○로 패를 때렸을 때 흑1은 정말 의외인데요.
▽김 7단=이 수를 보고 검토실의 모든 기사가 깜짝 놀랐습니다. 한창 패를 하고 있는 와중인데 끝내기를 하다니. 어떤 기사는 ‘돌을 던지기 전에 한번 둬본 수’라고 말했습니다. 보통 기사는 우상귀와 같이 크게 당하면 몸이 후끈 달아오르고 머리가 윙윙거립니다. 하지만 이 9단은 자신을 추스르고 흑1을 뒀습니다. 지금 패를 계속하면 어떻게 둬도 흑의 필패입니다. 이 9단은 다른 길로 가면 지니까 냉정하게 가장 큰 곳을 차지해놓고 상대의 처분을 기다린 겁니다. 물론 상대가 정확하게 두면 집니다. 하지만 흑1은 패배 확률이 99%인 상황에서 1%의 승리를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택한 수입니다.
▽기자=여기서 백이 패를 안하고 갑자기 백2로 좌변을 붙여갔는데요.
▽김 7단=좌변은 흑이 엷은 모양이어서 수가 날 것처럼 보이는 곳입니다. 하지만 백은 이곳을 손대지 말고 백14의 곳을 이어서 우상귀 패싸움을 계속 했어야 합니다. 아마 후 7단의 머릿속에는 ‘흑1’이라는 수가 없었을 겁니다. 승부를 가름하는 큰 패싸움을 놓고 팻감도 쓰지 않고 끝내기를 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겠지요. ‘드디어 이창호를 이겼구나’라는 생각에 약간 흥분 상태였던 후 7단은 흑 1을 보고 마지막 냉정함을 잃었습니다. ‘이 시급한 상황에서 끝내기를 하다니, 괘씸하다. 당장 숨통을 끊어 멋지게 이겨주겠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물론 좌변에서 정확하게 두면 수가 납니다. 하지만 초읽기와 수읽기의 착각이라는 변수를 고려한다면 백2는 모험이었습니다. 아직 ‘후류’의 침착함이 ‘이류’에 못 미친다는 점을 보여준 겁니다. 말하자면 흑1은 KO 직전의 권투선수가 오히려 가드를 내리고 ‘한번 쳐 볼테면 쳐 보라’고 유인하는 수였는데 백이 짧은 콤비블로로 응징하지 못하고 롱훅으로 헛방을 날린 것입니다.
▽기자=이후 진행을 보면 백이 좌하귀에서 엄청난 손해를 봤죠.
▽김 7단=백8로 먼저 ‘가’에 끊었다면 이렇게까지 손해를 보진 않았을 겁니다. 후 7단의 수읽기에 착각이 있었습니다. 수가 안 되는 걸 뒤늦게 확인한 백이 14로 이어 우상귀 패를 다시 시작했지만 이제 흑은 패를 져도 ‘나’ ‘다’를 연타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기자=후 7단이 마지막까지 냉정함을 유지했다면 한국의 세계대회 연속우승 기록을 깬 영웅이 됐을 텐데. 일류 기사들의 승부는 먼저 심리전에서 이겨야하는 것 같습니다.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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