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벼슬 살러 간 남편이 시골에 있는 부인에게 편지를 쓴다.
“내가 몇 달이나 혼자 지내면서도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니 당신은 내게 갚기 어려운 은혜를 입은 줄 아오.”
부인이 답장을 보낸다.
“군자가 행실을 닦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성현의 가르침이요, 환갑이 다 된 나이에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는 것은 당신 건강에 도움이 될 겁니다.”
이를 읽은 남편이 말한다.
“부인의 말과 뜻이 다 좋아 탄복을 금할 수 없다.”
16세기에 이 땅에서 살았던 유희춘과 송덕봉 부부가 이 대화의 주인공이다. 유희춘은 해남에서 태어나 전라감사, 이조참판을 역임하고 많은 저술을 남긴 당대의 명사이며, 송덕봉은 ‘덕봉집(德峯集)’이란 문집을 남긴 여성 군자였다.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는 유희춘이 만년에 자신의 생활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미암일기(尾巖日記)’를 번역한 책으로, 이 일기는 그 풍부하고도 생생한 내용 덕분에 이미 학계의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따라서 ‘미암일기’를 번역하는 데만 그쳤다면 그리 새로운 작업이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선보인 책은 일기 내용을 바탕으로 생활사, 가족사, 미술사, 건축사, 음식사, 복식사, 농업사의 성과를 아우름으로써, 16세기 한 양반 가정의 일상생활을 세밀하게 재구성하고 있다. 게다가 필자는 소설 기법을 가미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는데, 그 덕분에 등장인물과 그들의 생활상이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이 책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물론 중심 인물은 세상 물정에 어둡다면서 집안에 들고나는 물건을 일일이 기록한 유희춘과 노비만 백 명이 넘는 대가 살림을 훌륭히 꾸려 가는 안주인 송덕봉이다. 담양 집에는 결혼 후 친정살이를 하면서 부모를 모시는 큰딸(은우 어미)과 사위 윤관중이 살고, 삼촌 가족과 지내면서 집안 대소사를 챙기는 조카 유광운이 있다. 해남에는 가끔 찾아오는 남편을 시중드는 것으로 만족하는 천첩 방굿덕과 그녀가 낳은 네 명의 서녀가 살고, 맏아들 유경렴은 김인후의 사위로 들어가 처가살이를 하면서 가끔 부모님을 찾는다. 재주 많은 둘째손자 유흥문은 할아버지에게 글을 배우다 게으름 때문에 세 번씩이나 회초리를 맞았고, 해남 호장(戶長) 송원룡은 주인공의 청탁을 거부한 끝에 섬으로 귀양갔다.
이 책에서는 당대의 흥미로운 생활상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가족이 이동할 때는 통과하는 고을 수령에게 미리 연락하여 말과 음식물을 공급받았다든지, 중국 사신이 방문하면 일정 분량의 쌀이 녹봉에서 삭감된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또한 매달 내는 집세를 고기나 생선 같은 반찬거리로 대신하고, 부채를 화폐 대용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집을 지을 때는 승려 목수를 초청했고, 남자들이 귀를 뚫어 귀고리를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책을 읽다 보면 임금 행차를 구경하려는 여인들의 자연스러운 밤나들이며 잔칫집에서 여인들끼리 모여 앉아 술잔을 나누는 정경, 주인공이 밤중에 설사를 만나 참으로 오랜만에 목욕을 하는 장면, 또 길 떠나는 아들에게 자기 저고리를 벗어 입혀주는 모습 등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다만 책에 들어간 삽화 사진이 흐리고 사진 설명에 오류가 보이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가족제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제사와 가묘(家廟)제도의 등장에 대한 해설이 좀더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이 책의 장점을 가리지는 못한다. 역사적 사실을 엄밀하게 밝히면서도 독자들에게 읽는 재미를 선사하는 이 책은 생활사 연구에서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가 시작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김문식 서울대 규장각·학예연구사 kmsik@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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