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인지 모르지만 요즘 한국 정치에서 가톨릭 신자의 위력(?)은 대단하다. 김대중 대통령이 가톨릭신자로서 최초로 대통령에 당선된 데다 지난번 대선 때 득표 순위 1, 2, 3위를 한 노무현 이회창 권영길 후보도 모두 가톨릭 신자다. 한국 가톨릭 신자는 400만명 정도다. 불교나 기독교 신자 수에 비하면 아주 적은 수다. 그런데도 이들이 그만한 표를 받은 것을 보면 우리나라 유권자는 투표할 때 후보의 신앙을 별로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기를 쓰고 종교계를 찾아다니는 정치인들의 기대와는 영 딴판이다.
▷노 당선자는 후보 시절인 지난해 6월 김 추기경을 만났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처음이었던 모양이다. “예전에 영세를 받았습니다. 세례명이 유스토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신앙생활도 못하고 성당도 제대로 못 나가 프로필에 종교가 없다고 씁니다.”(노) “있다고 쓰면 성당에 나가야 하니까….”(김) “영세까지 받고 그러면 안 된다고 신부님들이 꾸중해 난처합니다.”(노) “하느님을 믿나요?”(김) “…믿습니다.”(노) “확실하게 믿나요?”(김) “희미하게… 믿습니다. 앞으로 종교란에 ‘방황’이라고 쓰겠습니다.”(노) 그러나 노 당선자의 공식홈페이지 종교 항목에는 아직 ‘무’로 적혀 있다.
▷김 추기경이 최근 한 가톨릭 교회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노 당선자에게 다시 신앙의 길로 돌아오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기도를 통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하느님께 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던가. 사실 앞으로 부닥칠 어려움들을 극복할 길을 찾기 위해서라면 없던 신앙이라도 새로 가진다고 해서 나무랄 사람도 없을 것이다. 물론 결정은 당연히 노 당선자의 몫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당선자는 추기경의 말 속에 담겨 있는 나라에 대한 염려와 깊은 애정을 항상 간직해 국정에서는 방황하는 일이 없기를 기대한다.
문명호 논설위원 munmh9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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