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 스무 살의 초보 속기사 안나에게 첫 일거리가 생겼다. 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구술(口述)하는 소설을 받아 적는 것.
작업을 마친 뒤, 마흔다섯 살의 작가는 안나에게 다음 소설에 대한 의견을 묻는다. …불치병을 앓는 침울한 예술가가 젊고 낙천적인 여성을 사랑하게 된다. 그 여성은 어떻게 반응할까?
“일생을 다해 당신을 사랑할 거라고 할 거예요!” 작가의 얼굴을 또렷이 응시하며 처녀는 대답한다. 몇 달 뒤 처녀는 이 홀아비 작가의 두 번째 신부가 됐다.
결혼생활이 평탄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작품을 빨리 넘기기 위해 속기사까지 고용할 정도로 작가는 빚에 쫓기고 있었다. 간질과 도박중독이라는 두 가지 ‘불치병’에도 평생 마음을 졸여야 했다. 거기에 비하면, 남다른 질투심은 차라리 사랑의 증명이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14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네 아이가 태어났고 그중 둘을 잃었으며 4년 동안의 해외여행이 있었고 작가의 대표장편 다섯 편 중 ‘죄와 벌’ 뒤의 네 편이 쓰여졌다.
1916년, 안나가 회고록을 내놓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진심을 다해 사랑했고 서로를 이해했으며, 안나에게는 남편의 사후 기억을 정리할 충분한 시간이 남아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속기사였다. 14년의 결혼생활을 세부에 이르기까지 소상히 기록해둘 수 있었던 것이다.
서문에서 안나는 수줍게 적고 있다. ‘이 글은 결점투성이다. 이야기는 장황하고 장(章)을 적절히 구분하지도 못했고 문체도 구식이고.’ 그러나 아이의 죽음과 간질발작 등 실로 다난(多難)하다 할 사건들에 두 사람이 반응하는 진솔한 마음의 기록은 독자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흡인력을 보여준다.
“모든 것이 이제 내게는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하지만 내가 분명하게 의식한 것이 하나 있다. 나 자신의 삶은 그가 죽는 순간 끝났다는 것, 내 마음은 영원히 고아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드물디 드문 이 고귀한 품성의 소유자가 우정으로 나를 대하고 사랑한다는 사실에 큰 자긍심을 가졌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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