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박원재/‘신용하락’ 일본의 경우

  • 입력 2003년 2월 12일 18시 33분


지난해 4월 국제 신용평가회사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는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을 ‘AA’에서 ‘AA-’로 한 단계 낮췄다. 이유는 과다한 재정 적자와 구조 개혁의 지연.

일본 정부는 발칵 뒤집혔다. “외환보유고 세계 1위인 일본의 신용도가 개발도상국만도 못하대서야 말이 되느냐”며 항의 서한까지 보냈지만 S&P측의 반응은 싸늘했다. 뉴욕 월가(街)에서는 “일본 정부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고 비아냥댔다.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평가 회사인 무디스는 한국의 신용등급을 두 단계 올렸다. 영국의 바클레이즈 캐피털은 “1년쯤 뒤 한일 두 나라의 신용등급이 같아지고 장기적으로는 한국이 ‘옛 가정교사’인 일본보다 우위에 설 것”이라고 치켜세우기까지 했다.

1년여가 지난 지금 한일 양국의 사정은 어떤가.

일본의 신용등급 하락은 주가 하락으로 이어져 경제에 타격을 줬지만 순기능도 적지 않았다. 재정의 무분별한 지출을 억제하는 정책을 펴 나랏돈을 흥청망청 써대던 관행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1조3000억달러의 대외자산과 막대한 무역흑자에 도취돼 있던 정치권과 관료가 나라 밖의 객관적인 시선을 의식하게 된 점이 성과로 꼽혔다. 기득권층의 뿌리깊은 반발에도 불구하고 우정(郵政)사업 등 공공부문 민영화가 일부 진전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반성의 기운은 시간이 흐르면서 약화됐다. 충격요법의 약효가 사라지자 집권층은 다시 타성에 젖었고 한때나마 반짝했던 개혁도 지지부진해졌다.

한국은 A등급으로 올라선 지 1년도 채 안 돼 신용등급 전망이 하락세로 돌아섰다. 무디스는 ‘안보 상황’을 이유 중의 하나로 꼽았지만 우리는 그동안 ‘한일경제 역전론’의 환상에 젖어 자만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이번 사태는 ‘입에 쓴 양약’이 될 수 있다. 신용등급 전망 하락을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 담긴 메시지를 바르게 읽어내 이를 끈질기게 바로잡아야 한다는 교훈을 일본이 보여주고 있다.

박원재기자 도쿄특파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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