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방형남/유령 빈 라덴

  • 입력 2003년 2월 12일 18시 33분


며칠 전 국내외 언론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750여명의 호주 여인들이 모여 있는 모습의 사진이 실렸다. 어떤 신문은 여인들이 다양한 자세로 풀밭에 눕거나 앉아 있는 큼지막한 컬러사진을 1면에 배치해 독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선정성 시비가 일고, 권위 있는 신문이 그런 사진을 게재해서 되겠느냐는 독자들의 질책이 쏟아질 법도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진 속 여인들이 호주의 이라크전 참전 반대운동에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이런 방법을 사용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여인들은 몸으로 하트 모양과 ‘NO WAR’라는 글자를 새겨 전쟁에 반대한다는 강렬한 메시지를 전 세계로 보냈다.

▷이라크를 상대로 한 미국의 전쟁준비가 착착 진행되면서 지구촌의 반전 분위기도 고조되고 있다. 15일에는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대규모 반전시위가 열린다. 영국 언론은 50만명 이상이 런던에 모여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축하 행사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를 벌일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국가 차원의 전쟁반대 열기도 길거리 시민들의 반전시위에 못지않게 뜨겁다. 프랑스는 독일 러시아 중국을 끌어들여 형성한 ‘반전 전선’으로 미국을 압박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라크전이 지구촌의 동맹 구도 재편이라는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올 것만 같다.

▷11일 방송된 알 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의 육성은 전 세계의 반전 분위기, 특히 이슬람권의 반전 열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빈 라덴은 아랍어 위성방송 알 자지라를 통해 자신의 건재를 과시하면서 전 세계 이슬람 신자들과 이라크를 향해 미국의 공격에 대항하라고 촉구했다. 이슬람 신자의 연례 메카 성지순례(하지)가 막 끝난 시점이어서 그의 메시지는 이라크를 지지하는 이슬람 신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은 빈 라덴의 육성방송이 ‘테러동맹의 급증’을 예고하는 것이라면서 잔뜩 긴장하고 있다.

▷미국은 2001년 아프가니스탄전쟁을 시작하면서 빈 라덴의 목에 2500만달러의 현상금을 거는 등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그를 잡지 못했다. 종적을 감춘 빈 라덴은 대신 결정적인 순간마다 방송에 등장해 미국의 약을 올리고 있다. 속이 탄 미국은 빈 라덴의 ‘입’인 알 자지라를 견제하기 위해 아랍어 TV방송 설립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러자 이번에는 알 자지라가 영어방송을 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쯤 되면 유령과의 싸움이나 마찬가지다. 미국이 유령과 싸우는 동안 전쟁과 평화, 우방과 적, 그리고 우방간의 골은 점점 깊어지고 있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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