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그들을 기억하는 한 이길을 가리라'

  • 입력 2003년 2월 14일 17시 47분


◇그들을 기억하는 한 이 길을 가리라/카트린느 장틸 지음 한덕화 옮김/264쪽 갑인미디어 8000원

‘여성 종군특파원의 열정 어린 중동취재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을 처음 들었을 때 큰 기대를 갖지 않았다. ‘중동의 종군특파원’이란 주제도, CNN의 스타 기자가 아닌 프랑스 TF1방송에서 일하는 저자도 낯설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저자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갔다. 10년 넘게 아랍권뿐 아니라 아프리카와 남미 등 분쟁지역만을 집요하게 찾아다니며 활동하는 종군특파원. 그가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은 희생자들의 편에 서서 진실을 말하는 일. 기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약자들에게 행해지는 불의에 대해 분노하고, 잠자고 있는 세상의 양심을 일깨우려는 저자의 뜨거운 열정이 묵직한 울림을 안겨주는 것이다.

기자로서 그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직전 사담 후세인과 인터뷰를 하고, 아라파트 수반과 동행 취재하는 등 빛나는 특종도 했다. 물론 자동소총 개머리판으로 얻어맞는 등 죽을 고비도 숱하게 넘겼다. 그런데도 성공적인 취재 일화나 영웅적인 활약상을 자랑하는 기색은 없다. 동료를 떠나보내고 죄없는 사람들의 희생을 어쩔 수 없이 지켜봐야 했지만 자신의 상처나 아픔을 과장하진 않는다. 현지인과 달리 그에겐 살아 있으면 돌아갈 곳이 있으므로.

폭탄이 터지고 바리케이드가 쳐진 그곳에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 람보처럼 탄띠를 두르고 다니지만 아들을 유치원에 데려다 주는 일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이슬람 전사, 초토화된 바그다드에서 조산원을 운영하며 무슬림을 돕는 수녀와 신부들….

그러니 태평한 사람들이 왜 듣기 좋은 뉴스만을 전하지 않느냐고 물을 때 분노할 수밖에. 그것은 바로 ‘세상을 좀 더 살기 좋게 만드는 것, 남을 걱정하기를 그만두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나쁜 일들은 폭로해야 하고, 세상에 얼마나 끔찍한 일들이 많은지 알아야 하며, 우리가 몇 년 동안 애타게 찾았던 신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버렸음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렇듯 진지한 주제를 무겁지 않게 풀어낸 것도 이 책의 미덕. 폭력과 광기에 휩싸인 분쟁의 숨가쁜 현장과 비행기로 몇 시간 떨어진 파리에서의 평온한 일상을 오가는 구성은 프랑스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유머도 잃지 않는다. 늘 받는 질문, 여자라서 불리했던 적은?

‘(걸프전 취재시 사막에서 만난) 군인들은 마치 되살아나 전세계 위문 공연에 나선 마릴린 먼로를 보기라도 하는 듯이 넋을 잃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곤 했으며 그 덕분에 내가 상사들의 주의를 끌고 있는 동안 동료들은 절대로 취재 허락을 얻지 못할 장면들을 몰래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책장을 덮으면 분쟁소식을 다룬 국제면 1단 기사가 달리 보인다. 이 세상에서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한 ‘강 건너 불 구경’이란 있을 수 없다. 불 나면 당장 달려가 힘을 보태줘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다. 바로 이 책의 육성이다.

고미석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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