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폭풍의 한가운데'

  • 입력 2003년 2월 14일 17시 47분


◇폭풍의 한가운데/윈스턴 처칠 지음 조원영 옮김/472쪽 1만3900원 아침이슬

평생 군인과 정치가의 길을 걸어온 50대 신사.

인생을 뒤돌아보기에는 조금 이르지만, 세계대전 등 몇 차례의 전쟁을 최전선에서 치렀고 예닐곱개나 되는 장관직도 거쳤으니 지난 일을 정리하는 데 모자람이 없다.

비행기 추락에도 멀쩡했으며, 방금 걸어나온 참호에 폭탄이 떨어지는 장면도 본 데다가 자기가 쏘아 죽일 뻔한 폭도가 남아프리카의 총리가 되는 것도 보았으니 ‘운명’의 고찰에 책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것도 납득할 만하다.

그러나 그가 알았을까, 머지않아 운명은 전화(戰禍)에 휩싸인 세계의 중심부로 그를 인도할 것이며, 위기에 처한 문명과 민주주의의 구원자로서 그의 만년은 훨씬 밀도 높게 장식되리라는 것을.

처칠이 이 책에 실린 산문들을 정리한 것은 58세 때인 1932년. 당 주류와의 정책 이견으로 각료직을 내놓은 지 3년 뒤였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총리가 기차 안에서 전쟁관련 서류를 검토하고 있다

‘정치가의 필력이라고 해봤자…?’ 우리로서는 자연스러운 의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20대에 보어전쟁(1899) 르포로 영국인을 열광시켰고 훗날 ‘2차 대전 회고록’(1953)으로 노벨 문학상까지 받은 문장력이라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군더더기 없고 위트 넘치는 그의 문장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새로운 단계의 문명과 인간정신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다.

“증오심은 찢어진 독일을 또다시 뭉치게 할 것이며, 격렬한 감정은 복수의 전쟁을 마음속에 사무치게 그리게 될 것이다. 독일의 실체는 프랑스보다 강하다.”(‘인류는 이대로 파멸할 수 없다’)라고 진단한 뒤, ‘현대문명과 영웅’ 편에서 그는 “현대사회는 진정 영웅 숭배를 없애버릴 수 있을까?”라고 물으며 “세상이 무언가 허전하고 불완전한 느낌으로 가득 차 있어 누군가가 대중을 끌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라고 시대의 기류를 짚어낸다. 독일의 잠재력과 증오심, 영웅주의에 대한 그의 예언은 결국 소름끼치는 형태로 현실화되지 않았던가.

‘오십년 후의 세계’ 편은 어떤가. 그는 △원자력 △초강력폭탄 △무선전화 △식량생산의 혁명 △합성인간 등 다섯 가지를 예언한다. 그 모두가 오늘날 세계를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특징들에 집중된다. “인간의 덕성은 지능의 발전에 훨씬 못 미치고 있다. 굳이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갈 경우, 인간의 영광은 돌이킬 수 없는 종말을 맞을 수도 있다”라는 충고 역시 ‘유효시한’이 없는 통찰력을 보인다.

그러나 그의 ‘수상(隨想)’은 ‘책상머리 명상’과 거리가 멀다. ‘폭도’였던 남아공 보타 총리를 비롯해 그에게 번쩍이는 대포를 자랑하던 독일의 빌헬름 2세 황제, 1차 대전의 명장인 포슈와 페탱, 아일랜드의 테러 지도자이자 능란한 협상가였던 마이클 콜린스, 기타 수많은 인물들이 그의 기억 속에서 생생한 피와 살을 얻고 있다. 지난 세기의 전반부 내내 그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현장들에 서 있었고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그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하나는 거듭 당적을 변경한 일이다. 우리네 ‘철새’들도 그의 해명을 참고하고 싶을 것이다. 다행히 우리 상황에서 그의 말을 ‘훔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정치인에게 있어 변하는 정당과 함께 가는 노선 변화는 일관성이 결여된 것이라도 숫자의 힘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다. 그러나 변하는 정당 안에서 혼자 지조를 지키는 것은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진정으로 중대한 주제를 앞에 두고 자신만의 신념을 따른다면, 어떤 장애도 뛰어넘어 성실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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