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씨앗'…밤의 지층을 뚫고 희망 싹틔우다

  • 입력 2003년 2월 14일 18시 00분


◇씨앗/김영래 지음/204쪽 7500원 민음사

아마존의 인디오들에겐 어머니가 둘이라고 한다. 하나는 낳아주신 어머니이고 또 하나는 바로 자연이다. 내부가 곧 외부이고 외부가 곧 내부인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잭과 콩나무’에서 나무를 타고 땅에서 하늘로, 하늘에서 땅으로 자유롭게 오르내릴 수 있는 것은 이 통로가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오면 자연이 우리를 길러주고, 성장해 늙고 죽으면 다시 캄캄한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한 인류학자의 말을 빌리면 ‘어둠의 순간에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원리이다.

어둠과 빛이 분리되지 않고 한 몸에서 사는 이러한 행복한 시절은 해가 진 후 시골집 아궁이에 생솔 가지를 태우면, 어느 순간 매캐한 연기가 사라지고 나무에 끓어오르는 물기 속에서 불이 타오르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사람이 죽고 나면 동구(洞口)에서 옷가지를 태우는데, 옷가지를 태우는 불은 생솔 가지의 축축한 물기 속에서 솟아 나온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 수 있다.

김영래의 장편 ‘씨앗’은 어둡고 축축한 자궁에서 태어나는 빛의 은유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현대사회의 안과 밖, 위와 아래의 이분법적 대립을 풀고 우리가 다시금 하늘과 땅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통로가 ‘씨앗’이 되고 있다. 소설의 한 대목인 ‘양달보다는 응달에서, 평지보다는 비탈에서 꽃을 피우는’ 여러해살이풀에 대한 이야기는 ‘씨앗’이 태어나는 자리가 우화(羽化)의 형식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일컫는다. 스스로를 벗는 자기 탈각을 하기 위해서는 빛과 그림자라는 분별의 잣대를 꺾어버리는 데서 존재의 개벽을 맞이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 죽음과 삶, 어둠과 밝음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하늘과 땅에 걸쳐 있는 나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신화와 무수한 에피소드를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는 이 소설이 ‘씨앗’의 프리즘에 주목하는 까닭도, ‘밤의 두꺼운 지층을 뚫고 발아하는 힘들’이 씨앗에 의해 구현되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 사라져버린 것을 되불러들이기 위한 씨앗 속에 믿음과 기쁨, 그리고 아름다움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대한 여행자인 씨앗은 세상 어디든 갈 수가 있단다. 그들은 도보 수행승과 같지.”라는 소설의 한 대목이 울림을 준다. 그 바탕에서 보면 작가의 말에 나오는 ‘주고받음으로 인한 상생(相生)’에 대한 간절한 염원은 희생이 태어나는 자리가 씨앗이 발아하는 자리라는 말로 읽힌다. 작가가 성경 구절을 빌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씨앗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로 즐겨 오독하는 까닭도 풍요란 희생의 제의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지 않은가.

동승 ‘야카’와 친구 탕노, 노마의 현실 여행과 씨앗을 소지하는 것이 불법이 되어버린 미래사회, 이렇게 현실과 픽션의 세계를 유려하고 환상적인 문체로 넘나들며 이 소설은 씨앗의 은유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 생명과 신성의 자리를 새롭게 설정하고 있다. 다만 소설에 지나치게 등장하는 원형의 신화들이 소설의 인물들과 녹아들지 않고 때로는 교조적으로 들리는 것은 작가가 너무 주제의식에 집착한 결과로 보여 아쉬움을 남긴다. 그 점이 구체적 삶의 교직으로 얽혀진 소설의 언어로 읽히지 않고 때로는 성인 동화와 같은 에피소드들의 나열로 흐려지고 마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박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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