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허영/의혹만 남긴 ‘北송금 해명’

  • 입력 2003년 2월 14일 18시 42분


김대중 대통령이 밝힌 대북 송금 내용은 별로 새로운 것이 없다. 언론에서 이미 보도한 내용을 대부분 그대로 시인하면서 해명하거나 변명하는 데 그쳤다. 현대가 대북 7대 경협사업을 30년간 독점하는 대가로 북한에 5억달러를 송금하는 데 국가정보원이 환전의 편의를 제공했고, 대북 송금은 실정법상 문제가 있지만 남북관계의 미래와 국익을 위해 더 이상 법적으로 따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대통령의 고뇌에 찬 성명에도 불구하고 아쉬움과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런 정도의 내용이라면 왜 좀 더 일찍 진상을 밝히고 국민의 이해를 구하지 못했을까. 감사원이나 검찰이 자체 판단으로 국익을 위해 법적 책임추궁을 유보하기로 했다는 대통령의 말은 공허하게만 들렸다.

▼대통령 발표 진상규명 외면▼

남북관계의 특수성으로 인해 정상회담을 은밀히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정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후에까지 진실을 숨겨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남북정상회담과 대북 송금이 무관하다면 현대가 외국환거래법이나 남북교류협력법 등 실정법을 무시하고 국정원으로부터 환전의 특혜까지 받아가면서 대북 뒷거래로 따낸 사업권은 정상회담의 다리역할에 대한 단순한 보상일까. 대북 송금이 정상회담 직전에 집중된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그 뒤 현대가 누려 온 엄청난 공적자금의 지원과 편파적 특혜는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뒷거래가 아닌 투명한 절차와 방법으로는 대북 경협이 과연 성사될 수 없었을까.

이런 의문점에 대한 해답은 이제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찾아야 한다. 그렇지만 기자회견에서 답변한 대통령 측근이나 그 밖의 관련 당사자를 국회에 불러 추궁해 본들 더 이상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 것 같지는 않다. 따라서 모든 의문을 풀기 위한 철저한 진상규명의 필요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할 것이다.

남북관계의 미래와 국익을 위해 더 이상 법적으로 따지지 말자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 문제를 지금 이 정도에서 덮어버리는 것은 보다 투명하고 국민합의에 바탕을 둔 성숙한 남북관계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의 헌법질서와 실정법을 무시한 ‘남북관계 지상주의’ ‘민족공조 지상주의’는 북한을 반국가 단체로만 보고 모든 대북 활동을 국가보안법의 잣대로 재려는 시각만큼 편협한 반헌법적 발상이다. 남북간의 긴장완화도 중요하고 남북경협도 계속 추진해야 한다. 그래서 평화통일의 헌법적 과제를 달성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대북 관계는 우리 헌법과 실정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따라서 혁명적 발상이 아니라면 헌법질서를 무시하는 대북 뒷거래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국익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 헌법이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를 실현 유지하는 것보다 더 큰 국익이 있을 수 있는가. 자유민주주의 헌법질서에서 국민의 알 권리를 실현하는 것은 통치의 목적이지 수단은 아니다. 대북 송금과 관련된 모든 의혹에 대해 국민이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는 것은 올바른 주권행사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따라서 ‘남북관계라는 국익을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는 목적과 수단에 관한 가치전도적인 발상이다. 그것은 국가목적적 국가사상의 잘못된 부활에 불과하다. 더욱이 진상규명을 하면 남북관계가 당장 악화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하나의 가설을 내세워 실체적 진상을 덮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특검뒤 처벌은 사법판단에▼

진실을 정확히 밝히고 국민의 합의에 따라 남북경협의 방법을 새로 설정하는 것이 오히려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길이 아닐까. 하물며 국제적 우려의 대상이 되고 있는 북한 핵문제가 혹시라도 대북 송금 내지 경협과 직간접의 관련이 있다면 대북 송금의 철저한 진상규명과 사후 대책은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떳떳하게 운신하기 위한 우리의 중요한 국익이다.

이 문제의 해법은 간단하다. 특검을 통해 진상을 철저히 밝힌 후 법을 어긴 관련자들의 처벌 여부는 사법부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다.

허영 명지대 초빙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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