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최장신 농구센터 대물림 하동기씨

  • 입력 2003년 2월 16일 18시 14분


“한 때는 내 슛도 유명했죠”. 국내 최초의 2m대 센터 하동기씨가 슈팅 포즈를 취해보고 있다. 현역시절 그의 손목 스냅은 부드럽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변영욱기자
“한 때는 내 슛도 유명했죠”. 국내 최초의 2m대 센터 하동기씨가 슈팅 포즈를 취해보고 있다. 현역시절 그의 손목 스냅은 부드럽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변영욱기자
왕년의 농구 국가대표 센터 하동기(45)씨. 삼일상고 3학년때인 78년 2m5의 큰 키로 태극마크를 단 그는 한국농구 사상 처음 2m 벽을 넘은 주인공이다. 그러나 하씨는 부상 때문에 대표선수 생활을 1년 남짓밖에 하지 못했다. 농구팬들의 뇌리에서도 하동기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그로부터 20년이 훨씬 지난 요즘 그의 이름 석자가 다시 오르내린다. 딸 은주(202㎝·20·일본 시즈오카 단과대)와 아들 승진(223㎝·17·삼일상고) 남매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한국 농구의 희망. 그러나 정작 본인들의 생각은 다르다. 일본에서 대학에 다니는 은주는 귀국할 생각이 없고 승진이는 NBA 직행을 은근히 바란다. 그래서인가. 하씨의 입술 주위엔 물집이 터져 까만 딱지가 붙어있다.

“아이들 진로 문제 때문에 고민이 많은 모양입니다.” “잠이 안 옵니다. 자다가도 새벽에 깨 뜬눈으로 지새울 때가 많습니다. 아내는 ‘애들보다 당신이 먼저 쓰러지겠다’고 난리입니다. 허허.” “원래 큰 키는 집안내림 입니까?”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기골이 장대했습니다. 아내도 1m70이니 작은 키가 아니지요.” “키가 크면 불편한 게 많을텐데…” “지금 사는 아파트 천정이 다른 곳보다 10㎝는 높은데도 나나 승진이나 툭하면 천정의 전구에 부딪힙니다. 택시나 버스를 타기도 어렵구요.”

요즘 하씨는 아들 뒷바라지에 팔을 걷어부쳤다. 그래서 그동안 해오던 사업까지 집어치웠다. 그는 2년 전까지만해도 잘나가던 스포츠마켓팅업체의 부장.

하씨가 명지대 4학년 때 일찍 농구를 그만둔 것은 부상 때문이었다.

“그 때는 정말 무식하게 운동했습니다. 체력을 키운다고 부산에서 서울까지 달렸는가 하면 새벽부터 저녁까지 체육관에서 공 가지고 뛰고 또 뛰고…. 결국 그런 훈련이 나처럼 키 큰 선수에겐 무릎이 망가지는 결정타가 되었죠.”

부상의 시련은 하씨에게서 끝나지 않았다. 딸 은주도 무리한 훈련과 경기 출전으로 무릎이 망가져 선일여중 3년 때 선수생활 불가 판정을 받았다. 하씨는 그 때 펑펑 울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전철을 밟게하면 안된다고 결심했다.

아들 승진(왼쪽)과 나란히 코트에 선 하동기씨. 2m5의 키가 작아 보인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아들 승진이는 초등학교 때 팀 대신 농구서클에만 가입시켰습니다. 그래야 운동량이 적으니까요. 중학교 때는 정식선수로 뛰었지만 다리가 부러져 2년 쉰 게 오히려 다행이었습니다. 고교로 진학한 뒤에는 일주일에 3번씩 웨이트트레이닝을 시키고 있는데 이젠 제법 근육이 붙었습니다.”

하씨는 아들로부터 전화가 오면 9인승 지프를 몰고 달려간다. 차를 사자마자 아들이 다리를 뻗고 앉을 수 있도록 개조했다.

하씨가 해외에 나가 가장 먼저 달려가는 곳은 신발가게. 아들이 신는 350㎜짜리 농구화를 국내에선 구할 수 없기 때문. 그래서 한 번에 10여켤레씩 사는데 공항 통과할 때마다 입씨름 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하씨는 현역시절 손목 스냅이 부드럽기로 유명했다. 자유투 성공률은 90% 이상이나 됐다. 은주 승진 남매도 아버지를 닮아 스냅슛이 좋다. 그러나 성격은 판이하다. 은주는 당차고 똑똑하다. 어린 나이에 혼자 일본으로 가 고교를 마치고 대학까지 다닌다는 것은 쉽지않은 일. 반면 승진이는 철이 안든 개구쟁이에 소심한 면도 있단다.

“딸은 무릎 부상으로 선수생활을 그만 두고 일본으로 갈 때 마음의 상처를 많이 입은 것 같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니까요.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 친구들, 선후배 등이 모두 일본에 있는데 왜 내가 한국에 가야 하느냐’고 말합니다.”

은주는 오카고 3년 시절 일본 여고농구 전관왕의 주인공. 한국여자농구 통산 최고의 장신이기에 당연히 눈독을 들이는 팀들이 많다. 또 승진이는 국내 각 대학마다 스카우트하겠다고 덤빌 정도. 하루에도 수십통씩 아이들 진로 때문에 전화가 끊이지 않는다. 오죽하면 승진이가 한 때 “농구 그만두겠다”며 도망까지 갔을까.

“승진이를 잡기 위해 여러 대학이 거액을 배팅했다는 소문까지 있는데….” “왜들 그러는 지 모르겠어요. 돈보다 아이 장래가 더 중요한 것 아닌가요.” “승진이 농구가 NBA에서도 통할까요?” “아직은 부족합니다. 그러나 박찬호가 한국에 있었으면 오늘의 그가 있었을까요? 아버지로서는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은주의 일본 귀화문제는?” “국가를 위해서 결단을 내리라고 하는데…. 답답합니다. 어쨌든 아버지로서는 딸의 행복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씨는 남매의 진로문제만 나오면 입을 다물었다. ‘건방지다, 돈을 밝힌다, 언젯적 하동기라고…’하는 식의 얘기가 들려올 땐 죽고 싶은 심정이라는 것. 그는 “내 살아온 인생을 언젠가 소설로 써보고 싶다”며 긴 한숨으로 인터뷰를 끝냈다.

김화성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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