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버스를 타고 대학가 정류장을 지날 때마다 젊은 연인들의 애정 표현이 놀라울 정도로 거리낌 없어진 데 질투를 느끼게 된다. 80년대엔 남녀가 손 잡고 다니면 ‘스캔들’이라 하지 않았던가. 한 세대 동안에 눈부신 경제성장뿐 아니라 의식의 개방화까지 고속으로 치러낸 것이다. 우리뿐 아니라 1차대전을 사이에 둔 한 세대 사이 유럽의 젊은이들도 비슷한 의식의 균열을 통과했다.
이 책의 원제는 ‘플래르트의 역사(Histoire du Flirt)’다. 프랑스어와 영어의 ‘Flirt’는 우리말로 딱히 번역하기 힘들지만 굳이 풀어 쓴다면 ‘(남녀의) 시시덕거림’ 정도에 해당한다. 처음엔 교태를 동반한 농담 정도를 뜻하던 것이 후에는 가벼운 스킨십을 지나 부모가 봐선 곤란할 정도의 접촉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바뀌게 되었다.
남녀간의 시시덕거림도 역사적 분석의 대상이 되는 걸까. 근대 이전의 여성들이 대개는 결혼 당일까지 성 의식 면에서 ‘미성숙’의 영역에 곱게 포장돼 있었던 점을 상기하면 그 변전의 역사가 사뭇 흥미롭다. 엄밀히 말하면 이 책은 프로이센-프랑스전쟁 무렵인 19세기 중후반부터 오늘날까지 프랑스인의 ‘플래르트’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발자크의 말을 들어 1830년대의 결혼이 대부분 ‘강간’과 같았다고 말한다. 성에 대해 무지했던 처녀들이 쇼크와 절망을 느낄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는 ‘밤에 냉담한 아내’와 ‘밖으로 떠도는 남편’들을 양산했다는 것. 그러나 세기말 황금시대에 이르자 ‘플래르트’는 일상의 유행어가 되었다. 키스와 포옹 등을 담은 마리 바스커체프의 일기는 소녀들의 탐독 대상이 됐고, 젊은 남녀는 가벼운 접촉을 동반한 ‘시시덕거림’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상대방의 실체를 가늠할 수 있게 됐다.
1차대전의 발발은 플래르트에도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 기존의 전쟁들보다 훨씬 길어진 청춘남녀의 격리는 불꽃같은 감정의 발화를 가져왔고, 대량 살육이 가져온 기존 도덕률의 붕괴는 자립적이고 선머슴 같은 여성형(갸르송)의 출현을 불러왔다. 짧은 스커트와 짧은 머리를 한 처녀들은 보호자 없이 혼자 다니게 됐고 플래르트는 훨씬 넓은 자유의 공간을 얻게 됐다.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영화관과 승용차는 플래르트에 더없이 적합한 공간이 됐다.
2차대전 이후 시몬 보부아르가 ‘제2의 성’으로 여성 인격의 독립성을 외치자 대부분의 남녀는 플래르트를 ‘주저해야 마땅한 선악의 문제’가 아닌 ‘성장에 있어서 통과해야 할 문제’로 인식하게 됐다. 성해방은 플래르트를 쇠퇴시키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기에 새로운 가치를 가져다주었다. 플래르트는 이제 남녀관계의 ‘동물적’ 측면에 맞서는 관계의 ‘인간적이고 문명화된’ 측면들을 강조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며, 사실상 남녀관계의 중대한 질적 차이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저자는 ‘플래르트’ 연구로 석 박사 학위를 받은 이 분야의 권위자. 누구나 흥미를 느낄 만한 주제를 미세한 부분까지 집요하게 파고든 정열이 돋보인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소설이나 서한, 회고록 등 인용 문헌을 따라가며 내용이 진행되지만 추상적인 소제목으로만 장을 구분하고 있어 필요한 내용을 연상하거나 찾기 어렵다. 생경하게 느껴질 수 있는 용어를 설명하기 위해서라도 역자의 서문 또는 후기가 필요했으리라는 아쉬움도 든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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