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박영균/하산(下山)

  • 입력 2003년 2월 26일 18시 24분


산에는 당연히 오를 때가 내려갈 때보다 더 힘든 데도 ‘내려 갈 때를 조심하라’는 말이 경구(警句)처럼 전해 온다. 힘은 덜 들겠지만 내려가는 길에 다치거나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뜻이다. 높고 험한 산을 오르는 전문 산악인이 아니더라도 등산을 즐겨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상식 같은 얘기다. 정상을 정복한 기분에 마음이 풀어져 하산 길에 화를 당한 경우는 수도 없다. 얼마 전 중년의 형제 부부가 눈 덮인 산에 올랐다가 하산 길에 희생된 것도 그런 사례다.

▷전문가들은 산에 오를 때와 내려갈 때의 요령이 다르다고 한다. 올라갈 땐 심장에 부담이 크고, 내려갈 때는 무릎 관절에 힘이 집중되기 때문에 심장이나 무릎이 약한 사람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 일반인도 직선으로 올라가지 말고 가능한 한 S자형으로 꼬불꼬불 가는 게 좋다. 내려갈 때는 딱딱한 바위보다는 충격이 덜한 흙을 밟으라고 한다. 임기 초에는 하늘을 찌를 듯 인기가 높던 대통령들이 임기 말에 너나없이 곤경을 겪는 것을 보면서 세상만사가 돌아가는 이치도 이와 비슷하지 않나 싶다. 하기야 오르막 내리막이 있는 경제도 급격한 상승이나 하강은 금물이다. 될 수 있는 대로 충격을 줄여 연착륙하는 것이 경제정책의 목표가 아니던가.

▷아마추어 초보들에게도 등산의 기쁨은 정상을 정복한 순간에 가장 크다. 그래서 작은 산이라도 오르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음은 절로 설레고 서두르게 마련이다. 하물며 권력의 정상인 대통령에 있어서는 말해 무엇하랴. 정상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마다 불굴의 의지와 힘이 솟아날 것이다. 그러나 등산을 처음부터 서두르다 보면 곧 힘이 빠져 정상에 오르기가 어려워지듯이 권력도 너무 급하게 휘두르면 이내 부작용이 나타난다. 노무현 대통령이 어제 첫 대통령수석비서관회의에서 “정권이 출범하면 사정(司正)활동이 소나기 오듯이 일제히 일어나는 경향이 있어 국민은 일상적인 것이 아닌 정권 초기 현상으로 느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 것은 ‘성급한 등산’의 부작용에 대한 걱정이 아닌가 싶다.

▷등산을 즐겨 하는 정치인들은 인간사를 산에 비유하거나 등산을 하면서 속내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엊그제 노 대통령 취임식에서 등산을 좋아하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한마디했다. 그는 “대통령 5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고 김대중씨에게 밤낮 없이 그랬다. 대체로 산에서 내려갈 때 다치니까 조심하라고 했는데…”라고 말했다. YS가 DJ에게 충고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따져봐야겠지만 딱히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누구든 새겨들을 만한 말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박영균 논설위원 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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