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억만장자 오프라

  • 입력 2003년 3월 4일 18시 35분


20년 전 한 뚱뚱한 흑인 여자가 미국 시카고의 TV 아침프로 ‘AM시카고’의 진행자가 되겠다며 오디션을 받으러 왔다. 경쟁 프로는 최고의 시청률을 올리던 잘 생긴 백인 남자 필 도너휴의 토크쇼다. 전에 일하던 곳에선 머리 모양부터 이름까지 완전히 바꿔야 성공한다고 쑤석이는 통에 여자는 잔뜩 주눅이 들어있었다. “전 흑인인데 그건 바꿀 수 없어요. 뚱뚱한 것도 아마 못 바꿀 거예요.” 그 말에 방송사 전무인 데니스 스완슨이 선선히 대답했다. “압니다. 당신은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재능이 있어요. 당신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그냥 당신 자신이 되세요.”

▷그 여자가 바로 흑인 여성 최초로 포브스지 선정 억만장자에 오른 오프라 윈프리다. ‘AM시카고’는 방송 한 달 만에 같은 시간대 시청률 1위로 올라섰고 1년도 안 돼 이름까지 ‘오프라 윈프리 쇼’로 바뀌었다. 오프라가 북클럽 코너에서 읽을 만하다고 선정한 책은 곧바로 베스트셀러가 됐고 이 쇼에서 거론돼야만 사회적 관심사가 된다는 의미에서 ‘오프라이제이션(Oprahization)’이라는 단어도 생겼다. 과거 오프라가 존경하던 도너휴는 한동안 방송을 떠났다가 옛명성을 업고 돌아왔으나 시청률이 나빠 지난주 MSNBC에서 쫓겨난 상태다.

▷미국 내 시청자만 2200만명에 세계 104개국에서 방영되는 토크쇼의 여왕, 잡지 케이블TV 인터넷까지 거느린 하포 주식회사의 회장, 자기 자신이 브랜드이자 돈인 오프라의 메시지는 20년 전 그의 일생을 결정지은 말 그대로다. 당신 인생을 책임지는 사람은 당신 자신이라는 것. 물론 인생의 성공 여부가 온전히 개인에게 달려 있다는 이 같은 ‘오프라이즘(Oprahism)’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없지 않다. 기회는 널려 있으므로 노력만 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을 합리화하고, 사회적 모순을 은폐하며, 여성과 소수민족에 대한 제도적 차별을 교묘히 감춘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사생아로 태어나 아홉 살 때 사촌에게 성폭행을, 사춘기 때 삼촌에게 성적 희롱을 당하면서 한동안 ‘함부로’ 살기까지 했던 오프라다. 옛 상처에 얽매여 현재를, 스스로를 학대하기엔 삶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가 방송 중 같은 경험을 한 여성을 만났던 서른여섯 살 때였다. 때로는 친정엄마처럼, 때로는 심리상담가처럼 출연자와 시청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 것도 이 같은 개인적 아픔을 딛고 일어선 덕이 크다. 누구에게나 한계는 있다. 세상이 거대한 벽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때 오프라가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억만장자까지는 안 바라더라도.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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