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박인제/억울한 사람 너무 많다

  • 입력 2003년 3월 6일 20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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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서초동 법조 주변은 확성기 소리로 시끄러운 날이 많다. 수십, 수백명씩 모여들어 소리 높여 무언가를 주장하고 규탄하는 일들이 심심찮게 벌어진다. 어느 노동조합, 어느 재야단체, 어느 시민단체에서 검찰의 구속, 석방을 비난하고 법원의 유죄 무죄판결을 성토한다. 여러 대의 버스에 나누어 타고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들이 ‘사기꾼 ○○○을 처단하고 피해를 완전 보상하라’고 외친다.

▼국가에 해답 묻는 시대 지나▼

단체 소속의 1인 시위보다 더 고독한 광경은 혼자서 길바닥에 대자보를 펼쳐놓고 전단지를 나눠주며 무언가를 호소하는 한 맺힌 모습이다. 아마 그는 이미 한 보따리 가득한 서류뭉치를 들고 이곳저곳을 헤매며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 달라고 숱하게 읍소하였을 것이다. 법률상담소가 있으면 그곳에 가고 부패추방단체가 있으면 거기를 방문하였을 것이다. 국민고충처리위원회가 생기면 달려가고,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되면 뛰어가고, 부패방지위원회가 신설되면 찾아갔을 것이다. 그들의 높은 목청 속에 공통되게 들어있는 낱말은 억울, 억울함이다.

억울한 사람이 어디 서초동에만 있겠는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벌써 몇 년째 정기집회를 계속하고 있는 일본대사관 앞에도 있고,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들을 추모하는 촛불집회에도 있었다. 분신 사망한 두산중공업 노동자를 위한 모임에서도 있고,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철도 선로까지 점거하였던 격렬한 시위현장에도 있었다. 글리벡 약값을 낮춰줄 것을 눈물로 호소하였던 백혈병 환자들의 울부짖음 속에도 어김없이 억울함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다. 사령실에서 제대로 모니터링을 하였다면, 불이 났으니 차를 세우라든가 바로 통과해 버리라고 하였다면, 차를 죽이고 도망가라는 어처구니없는 지시만 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인명 피해는 없었을 것이 아닌가. 유가족들이 비통하게 절규하는 대구지하철 방화 참사 현장에도 억울함은 넘쳐난다. 심지어 방화를 했다는 김대한씨마저 혼자 죽기는 억울하였다고 하지 않는가.

억울함이 저렇게 눈에 띄는 곳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매맞고 산 세월이 억울하기만 한 여성도 많고, 아침부터 산에 오르는 실직 가장의 한숨 속에서도 억울함이 묻어난다. 이만큼 살게 만들어 놓았는데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나이에 변방으로 내몰렸다고 생각하는 5060세대 또한 억울한 심사를 가눌 수 없을 것이다.

억울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억압과 차별과 소외에서 오는 갈등을 제대로 조정하지 못하는 데에서 온다. 소외에서 참여를 표방하는 새 정부는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 줄 것인가. 검찰수사에도 법원재판에도 국민의 참여가 확대되면 서초동에서 확성기 소리가 많이 줄어들지 모른다. 저 민족자존의 함성을 모아 국제사회에서 보다 당당해지면 일본 정부는 군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하고 미국 대통령은 장갑차 사건을 직접 사과할지도 모르겠다. 참여복지가 실현되면 여성, 노동자, 장애인 같은 소외되었던 사회적 약자의 지위도 향상될 것이다.

그러나 되짚어 보면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는 국가, 시장, 시민사회가 힘의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다. 국가의 힘이 과도했던 시절의 그 억울했던 날들을 기억해 보라. 국정참여도 작은 정부에의 참여일 뿐 해결해줄 일의 한계가 분명하다. 하물며 참여 의지조차 없이 스스로를 소외시켜 버리는 저 대구지하철 방화 용의자의 좌절과 절망에까지 무슨 해답을 주겠는가.

▼시민사회 공동체정신 필요▼

이제 국가에 대해서만 답을 물을 때는 지났다. 공동체정신을 나누는 시민사회를 가꾸는 데에서도 억울함을 풀어 줄 희망의 근거를 찾아야 한다. 대구 참사를 어루만지는 국민의 따뜻한 손길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의 눈길이 무겁게 머문 곳은 갈라져서 열린 3·1절 집회의 낯선 풍경들이다. 양극의 균열로 사회통합이 깨어진 곳에서 갈등이 쉬이 조정되고 억울함이 쉬이 사그라지겠는가. 좁디좁은 중간지대의 틈새를 벌려 해원 상생의 길을 만들어 나가는 외롭고 고단한 작업을 시작할 때다.

박인제 변호사·객원논설위원 ijpark235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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