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명재/‘前科 경영자’

  • 입력 2003년 3월 6일 20시 32분


‘검찰 수사를 받는 재계 수장.’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청사에 들어서는 손길승(孫吉丞) 전경련 회장의 모습은 전경련 역사의 ‘어두운 전통’ 하나를 잇는 장면이었다. 과거 몇 명의 선배 전경련 회장들도 손 회장처럼 검찰수사를 받고 처벌당했다.

한국 경영자들의 호적등본을 조회해 보면 ‘빨간 줄’이 그어져 있는 경우가 꽤 많다. 죄목은 여러 가지지만 대개 회사 일을 하다가 처벌받은 기록들이다.

유난히 경영자 중에 전과자가 많은 한 대기업의 경우 “사장이 되려면 감옥에 갔다오는 게 필수”라는 말도 나돌았을 정도다. 이 그룹의 대표적인 전문경영인으로 꼽혔던 이는 두 개의 전과를 갖고 있었다. 특이한 건 그런 불명예가 회사 내에서의 승진과 출세에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때로는 훈장 구실을 했다.

그렇게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도 상당수의 한국 경영자들에게 회사와 감옥은 담 하나를 맞대고 있는 곳인 듯하다.

경영자가 전과자가 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명백히 불법을 저지른 경우도 있을 것이고, 수단이야 어찌됐든 결과만을 좇는 전근대적 기업경영관행에서 비롯된 경우도 많다. 특히 힘없는 전문경영인들은 오너에 무조건 복종하다가 하루아침에 전과자의 굴레를 뒤집어쓰기도 한다. “회사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인데 법이 너무 규제가 많아 실정법을 어기게 된 것”이라는 항변도 있다. 실제로 법규의 엉성함과 들쭉날쭉한 집행이 문제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떻든 정상은 아니다. 수천, 수만명의 직원들을 거느리며 사회적 존경을 받아야 할 전문경영인에게 범법의 덫이 일상화돼 있다면 그건 기묘한 상황이다. 모험과 혁신을 기꺼이 감내한다는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이 불법의 위험까지 짊어지는 것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를 ‘법과 현실의 거리’라는 말로 손쉽게 설명해서는 안 된다.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사회 각 부문이 정상화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유야 어찌됐든 전과 경영자 양산이라는 우울한 전통은 이제 그만 청산할 때가 됐다.

이명재기자 경제부 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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