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에 대한 미시사적 고찰을 담은 책.
과거에 ‘걷기’는 너무 일상적인 일이어서 여기에 주목하기는 쉽지 않았다. ‘걷기’에 대한 책이 읽히는 사회는 역으로 ‘걷기’가 눈에 띄게 사라지고 있는 사회다.
인간은 ‘걷기’(직립보행) 시작하면서부터 비로소 인간이 됐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걷기’의 영역 안으로 ‘타기’가 침입해 온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는 소수의 인간이 말을 타고 수레를 탔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인간이 차를 탄다. 심지어 차를 타고 헬스클럽에 가서 러닝머신 위를 걷거나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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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뙤약볕 아래 긴 논두렁을 걸어 학교에 다녀본 이들에게, 군대에서 2박3일 철야로 100㎞ 행군을 해 본 이들에게 걷기는 고통스러운 과정일 뿐이다. 오랫동안 걷기는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다. 사실 걷기의 역사가 아니라 ‘문화적 행위’로서 걷기의 역사는 서구에서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장 자크 루소는 그 역사의 출발점에 서 있다. 루소는 ‘걷는 것에는 생각을 자극하고 생명력을 불어넣는 뭔가가 있다. 한곳에 머물러 있을 때는 생각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정신을 움직이게 하려면 육체가 움직여야 한다’고 썼다.
저자는 고대 그리스의 소요(逍遙)학파, 칸트의 유명한 산책 등을 따라가면서 걷기와 철학 사이의 관계를 짚어 나간다. 많은 철학자들은 걸으면서 생각했다. 그러나 루소처럼 걷기에 대해 사유를 전개한 철학자는 드물었다.
걷기에 대해 사유한 또 한 명의 진정한 철학자는 현상학자 후설이었다. 그는 생애의 후기에 생활세계 현상학을 전개하면서 ‘걷기라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세계와 관계하는 우리의 육체를 이해하게 된다’고 썼다.
저자는 걷기의 철학에서 걷기의 미시사로 넘어간다. 걷기가 산책이라는 문화적 개념으로 발전하고, 다시 정원 산책에서 들과 산으로 확대된 계기와 그 의미를 짚어본다. 18세기까지만 해도 걸어서 여행하는 사람은 야만인이나 기인(奇人) 취급을 당했다. 그마저도 자연의 풍경을 감상하며 걷기 자체를 즐겼던 것은 아니었다. 워즈워스 이후 걷기는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의 특징이 됐다. 셜리는 귀족적인 무정부주의자였고 바이런은 다리를 절었기 때문에 선박이나 마차를 타고 다녔고 걷기와는 인연이 없었다. 열정적으로 도보여행을 즐겼던 워즈워스는 산책을 정원에서 끌어낸 최초의 인물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는 걷기 클럽(우리식으로 말하자면 등산회)의 황금기였다. 광활한 숲 속을 지나 냇물이 흐르는 초원을 함께 걷는 것은 소로, 뮤어 등과 같은 자연주의자를 만나면서 한때 전성기를 맞았다.
저자는 이제 시골의 걷기와 도시의 걷기에 대해 생각한다. 시골의 걷기는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쉽게 정당성을 얻었다. 그러나 도시에서의 걷기는 위험하다. 거리에는 부랑자나 창녀 등 폭력적이고 비천하며 성애와 관련된 것들이 널려 있다. 자동차는 씽씽 달리고 걸어다닐 여유공간도 부족하다. 이제 사람들은 러닝머신 위에서 걷거나 뛰는 동작을 시시포스처럼 반복할 뿐이다. 원제 ‘Wanderlust:A History of Walking’(2000)
송평인기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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