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동우/대구 民心

  • 입력 2003년 3월 16일 18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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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의 희생으로 이 세상은 달라질 것입니다. 훗날 그대들이 만든 더 나은 세상을 다시 보러 오십시오. 그리고 지금 우리의 눈물이 그대들의 새로운 삶에 기쁨과 사랑으로 승화될 것입니다.’

‘마지막 말 한마디. 사랑해…. 아, 사랑한다는 말이 이토록이나 슬픈 말일 줄이야.’

대구지하철 중앙로역. 길이 500m, 폭 20m 남짓한 지하 1, 2층 구내를 한 발짝 한 발짝 걷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히게 된다. 이 세상 그 어디에 이보다 더 애절한 사랑의 편지가, 이보다 더 가슴 저미는 사연들이 펼쳐질 수 있을까.

연기 검댕으로 지하 공간은 온통 적막 같은 흑색으로 변해 있고 그 검게 변한 벽면에는 수천 수만의 사연과 편지 그리고 추도시가 펼쳐져 있다. 벽면뿐만 아니다. 피켓 게시판 쪽지 형태로 전시되어 있는 사연들도 수없이 많다. 그 어떤 대하소설로도 담아낼 수 없을 것 같은 사연들과 지하철역 구내의 검은 공간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거대한 예술품이 된 느낌이다. 가장 슬픈 예술품.

대구는 지금 상중(喪中)이다. 도시 전체에 ‘삼가 명복을 빕니다’라는 플래카드가 넘쳐나고 사람들은 표정을 잃었다. 참사 한 달이 다가오면서 시민들의 삶은 서서히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으나 충격과 분노 그리고 허탈의 심사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 대구 사람들의 심사를 대구 정화중의 장재덕 교사(시인)는 “매사에 무관심해져 있다”고 말했다. 분노를 넘어 심드렁해져 있다는 것이다. 반면 한 지역 언론인은 “상실된 신뢰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앙정부나 지방정부, 여야 정당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총체적 부실과 허술함에 대해 절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구지하철 방화참사는 그동안 수많은 선행(先行) 경고 사인이 있었으나 당국이 이를 주목하지 않는 바람에 큰 사고로 이어졌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연착이나 순간적인 정차 등 운행상의 문제점과 크고 작은 사고들이 많았지만 당국이 이를 주목하지 않은 채 없었던 일처럼 넘어간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는 서울지하철에서 최근 크고 작은 사고들이 유독 많이 발생하고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서울의 경우도 과거에는 그러한 사고들이 지하철 당국과 승객들이 무시하고 지나가는 바람에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요즘은 모두가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탓에 공개되고 보도되는 차이일 수도 있다. 결국은 당국이나 시민 모두가 어떤 자세를 갖고 있는가가 다가올 재난을 예방할 수 있느냐의 갈림길인 듯싶다.

대구 경북지역의 종교 지도자 중 한 분이면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이문희 대주교는 우리 사회의 미성숙함을 나무라며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우리 사회에서는 지금도 크고 작은 경고등이 켜져 있는 분야가 적지 않으나 그것을 못 보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었다.

정치나 국가 경영도 마찬가지다. 민심이라는 경고등은 마치 대낮에 켜진 촛불 같아서 멀리서 보면 잘 보이지 않는다. 늘 멀리 있는 사람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현지에서 본 대구 사람들의 정서가 꼭 현 정부와 정권에만 비판적으로 흐르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대구 시민들은 이번 참사와 관련해 정부 여당뿐만 아니라 야당의 잘잘못도 정확하게 가려 평가하고 있었다. 이 역시 민심의 흐름에 늘 귀를 열고 자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여야 정치권에 보여 주는 하나의 경고이기도 했다.

종교인 교수 교사 언론인 등 대구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전하는 지역 정서는 이 대주교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야 정치인들과 위정자들이 늘 깨어 있는 자세로 말없는 다수의 정서에 더욱 주목해 달라”는 것이었다.

정동우 사회1부장 foru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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