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와중에 가슴 깊이 와 닿는 하나의 경구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외교의 큰 그림을 그리며 전후 질서를 설계했던 조지 케넌은 가장 가까운 동맹국인 프랑스에 대해 “차라리 친구보다 적이 더 낫겠다”고 일갈한 바 있다. 서로 상이한 입장을 지닌 나라들이 냉혹한 국제정치의 무대에서 친구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역설적으로 강조한 것이리라. 그런 만큼 국제사회에서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절실한 것이다.
▼부시 행정부에만 매달린 외교 ▼
필자는 이달 초 10여일간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 그곳의 투자가, 언론인, 정책결정자들과 한미관계에 대해 토론하는 기회를 가졌다. 다양한 미국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필자는 우리의 대미 인식에서 큰 구멍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많은 미국인들은 한국의 변화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했고, 때로는 동감을 표시했으며, 때로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 속에는 북핵 위기, 한국의 변화, 한미동맹에 대해 실로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미국 내의 흐름과는 대조적으로 우리가 보는 미국은 지나치게 단순한 이미지에 의존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우리 정부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한마디 한마디에 촉각을 세우고 일희일비해 왔지만, 정작 미국 내에는 부시 행정부와는 전혀 다른 인식과 해법을 가진 세력들이 적지 않게 포진하고 있었다. 워싱턴에서 만난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의 정책 담당자들은 미 행정부가 그동안 한국의 변화에 너무나 둔감했다는 점에 대해 전적인 공감을 표시했다. 또한 뉴욕 월가의 투자자들은 부시 행정부의 강경한 북핵 해법이 가져올 투자 분위기의 냉각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갖고 있었다. 다시 말해 한미동맹, 북핵 해법에 있어서 한국에 이전보다 신장된 역할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것이 대세라는 생각이 의회와 이익집단, 경제계에 적지 않게 퍼져 있었다. 결국 미국 외교의 궁극적 권력은 행정부가 쥐고 있다 하더라도, 그 권력은 이익집단, 언론, 의회에 둘러싸여 있다는 상식에 가까운 현실을 우리는 도외시해 왔다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다.
우리의 단순한 대미 인식은 여러 차원에서 문제를 일으켜 왔다. 첫째, 한미간에 조성된 긴장을 해소하고 정책상의 이견을 조율하는 데에 있어서 지나치게 부시 행정부에만 매달리는 단순한 대화 통로를 가져왔다. 그에 따라 부시 행정부가 북한에 대해 강경한 입장으로 내달릴 때, 우리 정부는 별다른 대책 없이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결과를 가져오곤 했다.
둘째, 미국에 대한 단순한 인식은 우리 내부의 문제로도 이어진다. 부시 행정부의 정책을 미국 사회 전체의 입장과 동일시하다 보니 우리 사회 내의 친미-반미간의 이분법적 갈등은 더욱 확대되어 왔다. 예를 들어 한미 공조의 중요성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부시 행정부의 강경정책을 단순 추종하는 친미주의자라는 비판이 따라붙는다. 또한 부시 행정부의 정책을 강렬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미주의자라는 도식적 구분이 쉽사리 붙여지곤 한다. 다시 말해 동맹국에 대한 단순한 이해가 우리 내부의 도식적 편 가르기를 부추겨온 것이다.
▼친미-반미 ‘이분법적 갈등’ 낳아 ▼
우리는 요즘 9·11테러 이후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진 ‘친구’를 갖게 되었다. 그럴수록 양국 관계를 현명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쪽의 내부 사정을 면밀하게 살펴봐야 한다. 우리가 상대의 내부에서 우호세력을 더 많이 찾아내어 관계를 다져나갈 때, 우리는 더 나은 입지에 설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작업은 정부뿐만 아니라 언론, 전문가, 비정부기구(NGO)와 같은 다양한 주체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분업을 통해 추진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당당한 파트너라는 위치는 단순히 목소리를 높여 얻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맥을 짚는 신중한 처신을 통해 얻는 것이다.
장훈 중앙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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