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끝을 코앞에 둔 1998년, 소설 ‘소립자’를 둘러싸고 연일 프랑스 언론이 떠들썩했다. 어디를 막론하고 소설이 화제의 중심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사건이다. 그곳 서평을 인용하자면 “다른 소설들이 토끼를 사냥하고 있을 때 이 소설은 거대한 사냥감을 노렸기” 때문이다. 작가가 노린 사냥감에 딱 하나의 이름을 붙이기는 어렵다. 정치적 구분을 빌리면 신자유주의, 68세대의 진보주의와 같은 좌우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도 있지만 크게 본다면 사랑 자유 평등과 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시비를 걸고 있다.
작가의 생각을 거칠게 요약하면 인류는 빵을 고루 나눠먹는 문제는 대충 해결했지만 빵보다 중요한 ‘사랑’은 날이 갈수록 빈곤과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 ‘소립자’는 세기말 우울증에 빠진 두 명의 중년남자를 내세워 이러한 작가의 생각을 소설로 풀어낸 작품이다.
두 남자의 불행은 세기 초에 태어나 부모세대가 남긴 역사적 유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 부모는 빈곤을 극복하고 자유와 평등을 몸소 실천한 진보적 세대에 속한다. 1968년을 기점으로 자신이 신봉한 이념을 실험한 부모는 그 뒤부터 이념적 지향성을 상실한 나머지 정치 구호의 접두사였던 자유와 평등을 ‘다른 곳’까지 넓힌다.
부모세대가 자유연애, 남녀평등에서 시작해 명상주의 신비주의 생태주의 생명주의까지 숨가쁘게 배를 갈아타는 동안 이혼율은 급증하고 가족은 붕괴된다. 기숙사나 할머니 밑에서 자란 그 다음 세대는 중년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부모의 프리섹스운동 덕분에 매춘과 포르노는 지천에 널려있지만 자유경쟁의 미명하에 사랑도 빵과 마찬가지로 독과점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고 느낀다.
사랑받지 못한 자가 사랑할 수 없어 우울증에 빠진 이야기로 요약되는 우엘벡의 소설은 부모세대의 가치관에 대한 독기 어린 복수전이다.
20세기를 우울하게 채색한 뒤 다음 세기를 그린 밑그림은 더욱 어둡다. 작가는 사랑의 독점과 소외에 대한 해결책으로 유전자조작을 통해 남녀의 성 구분을 없앤 새로운 인류 탄생을 내세우는 것이다.
“인류는 이제 자기 자신을 다른 종으로 대체하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에서 처음 있는 일입니다. 인류는 스스로를 소멸시키고 다른 종으로 거듭 태어나는 최초의 동물 종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점을 자랑스러워하게 될 것입니다.” 소설은 21세기 중반 무렵 현 인류가 멸종하고 그 빈자리에 새로운 인류가 살게 되는 것으로 끝난다.
이 소설은 당연히 좌우익, 종교계, 여성단체로부터 몰매를 맞았지만 금세기 알베르 카뮈 이래 가장 중요한 문제작이라는 극찬도 받았다. 문제작과 걸작은 언뜻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크게 다르다고 한다. 1994년 작 ‘투쟁 영역의 확장’, 1998년 작 ‘소립자’, 2001년 작 ‘플랫폼’이 모두 우리말로 옮겨졌으니 독자에게도 일단 판단의 기회가 생긴 셈이다.
이 재 룡 문학평론가·숭실대 불문과 교수 jllee@s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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