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어디서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헛디딘 발바닥을 뚫는 대못처럼 뾰족한 그 무엇이 순간, 등뼈를 훑고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브레이크에 발이 얹혀졌다 4차선 도로가 일제히 출렁이고 거센 빗발이 솟구쳤다
희미한 전조등 불빛에 드러난 것은 허리가
반쯤 꺾인 누렁개 한 마리
반사적으로 일어난 놈은 단말마를 내지르며
인도 쪽으로 죽자고 내달았다
짝이 맞지 않는 네 다리를 허우적거렸다
아스팔트에 묻어 있는
비명을 깔아뭉개며 나는 더욱 세차게 차를 내몰았다
앞차가 가졌을 뭉클한 감각이
그대로 내 바퀴에 전해지는 것 같았다
화물칸에서 떨어진 나무토막이 아니다 그것은, 길바닥에 흔히 짓뭉개져 있는 도둑고양이의 머리통도 아니다 살아 있는 감각과 무엇보다 그 찢어지던 悲鳴!
나는 나의 컴컴한 지하실을 들여다보았다
검은 꽃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었다
-장옥관, ‘비명’
전쟁에 대한 공포가 전 세계를 뒤덮고 있는 때에 한 권의 시집을 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거대한 폭력 앞에 문학이란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가를 절감하면서 장옥관의 시집 ‘하늘 우물’(세계사)을 읽었다. 그러면서 내내 생각했다, 시인은 아름다움을 발굴하는 자이기도 하지만 아름다움이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각성과 진혼을 담당하는 자라는 것을. “생명과 반생명의 극단을 오가며 베낀 노래와 신음의 언어”라는 시인의 자서(自序) 또한 그걸 잘 말해 준다. 이 시집에는 자연과 우주의 비의를 섬세한 언어로 조형해낸 시들도 많았지만, 유독 이 시에 주목하게 된 것은 이명처럼 들려오는 비명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시가 전쟁을 직접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동차라는 문명의 이기가 일순 흉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속도와 그것의 폭력성을 돌아보게 만든다. ‘아스팔트에 묻어 있는/ 비명을 깔아뭉개며’ 더 세차게 차를 몰아가는, ‘앞차가 가졌을 뭉클한 감각이/ 그대로 내 바퀴에 전해지는’ 죽음의 만찬은 이미 일상에 미만해 있다. 비명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먼 나라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니다. 살육에 대한 감각마저 잃어가고 있는 우리 마음의 ‘컴컴한 지하실’에서도, 바퀴들이 맹목적으로 질주하는 저 ‘4차선 도로’ 위에서도 이미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하늘 우물’은 그런 반생명적 현실과의 대면을 고통스럽게 치러낸 내면의 기록이다. 세계의 비명을 고통스럽게 받아 적고 몸으로 살아내는 일이야말로 문학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대응이라고 할 때, 이 시집의 위의(威儀)와 무게는 결코 왜소하지 않다.
나희덕 시인·조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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