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홍찬식]세대 갈등의 진실

  • 입력 2003년 3월 21일 18시 28분


지하철을 타면 이따금 민망한 일을 목격한다. 나이 지긋한 노인과 젊은이가 자리를 놓고 벌이는 언쟁이다. 이런 일은 주로 경로석에서 벌어지는데 먼저 노인 쪽에서 언성을 높이고 젊은이가 이를 되받아 격렬한 말싸움으로 비화되곤 한다. 노인 쪽에서는 경로석인데 왜 젊은이들이 자리를 빨리 비키지 않느냐고 화를 낸다. 젊은이들도 가만있지 않고 뭔가 이유를 들면서 또박또박 항의하는 모습은 과거 세대와는 다른 특징이다.

요즘 20, 30대들은 거의 대학교육을 받았을 만큼 교육수준이 높기 때문에 경로석이 노인을 위한 자리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따라서 젊은이들이 문제 삼는 것은 다른 데 있다. 상대방이 불쾌한 표정으로 윽박지르듯 자리를 비키라는 것에 감정이 상한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좌석을 양보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나이든 사람 빨리 자리비우라? ▼

이런 입장이 정반대로 뒤바뀐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나이든 사람들에게 빨리 자리를 비우라는 압력이 곳곳에서 가해지고 있다. ‘인적 쇄신’이라는 이름으로 공무원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물갈이 인사도 그런 사례다.

물갈이 대상은 언제든 위에서 자리를 비우라면 비울 수밖에 없는 1급 공무원들이라지만 아래 직급의 공무원에게도 남의 일로 느껴질 리가 없다. 이전부터 후배들 눈치가 보인다는 공무원들이 많다. 이와 관련해 “공무원으로서 1급까지 했으면 다 한 것”이라고 했다는 정찬용 대통령인사보좌관의 ‘살벌한’ 표현은 다른 공무원들에게도 “공무원 생활 십수년 했으면 다 한 것”으로 들릴지 모른다.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과 평검사들의 토론에서도 중년 세대들은 토론의 취지나 본질과는 상관없이 대통령이 젊은 검사들만 상대했다는 점에서 소외감을 느꼈다는 사람들이 많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노 대통령의 승리를 곧 자신의 패배로 받아들인 이들에게는 충분히 그렇게 비칠 만하다.

정부의 ‘인적 쇄신’ 작업은 개혁을 위한 선의로 받아들이고 싶다. 새 정부의 지향점이 분명히 존재하는 만큼 불가피한 단계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을 바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처리하는 방법에 있다. 내쫓기듯 떠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동안 국가에 대한 기여나 그들이 갖고 있는 경험을 생각하면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지하철 트러블’에서 젊은이들을 섭섭하게 만든 것이 상대방 태도에 있듯이 강압적 방식은 감정만 상하게 하고 세대간 갈등을 부추길 뿐이다.

공직사회 만은 아닐 것이다. 나이든 세대들은 누가 뭐라고 하기 이전에 스스로 퇴진의 압력을 느끼고 있다. 5년 전 국제통화기금(IMF) 체제가 닥쳤을 때 벌써 많은 중년 이상의 세대들이 설 곳을 잃었다. 세대간 대결 양상을 띠었던 지난 대통령선거의 결과가 이들에게 설상가상의 충격으로 여겨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보다 핵심적인 것은 이들을 한꺼번에 내보내는 것이 국가와 사회를 위해 바람직한가 하는데 있다. 젊은이들에게 일제히 자리를 내줘서 한국 사회가 나아질 수 있다면 기꺼이 자리를 내주겠다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어떤 역사적 경험에서도 상황이 나아졌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격변기에는 나이든 세대들의 역할이 더 중요했다. 어느 사회, 어느 시대든 구세대와 신세대는 각자의 역할이 따로 있는 것이다.

▼“정치적 목적” 의혹 받을수도 ▼

사실 젊은이들도 구세대에게 불만은 있을지언정 적대감 같은 것은 없어 보인다. 우리 사회가 아직 전통이 살아있고 건강하다는 증거다. 걱정스러운 것은 오히려 정권 쪽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처럼 세대간의 편을 가르는 것은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손쉬운 방법이다. 구세대를 ‘한물간 세대’나 ‘오염된 세대’로 몰아 내쫓는 것은 나머지 다수로부터 암묵적 방임 또는 지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정부가 내세우는 화합과 상생의 정치가 아닐뿐더러 이렇게 해서 지지를 얻는다 해도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만약 앞으로 정부의 개혁작업이 그런 식으로 진행된다면 과거 정권들이 지역 ‘감정’을 ‘갈등’으로 증폭시켰던 것과 같이 정치적 목적으로 세대 간 갈등을 부추겼다는 준엄한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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