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문의 소설집 ‘꿈’은 제목 그대로 ‘꿈’의 이야기들이다.
꿈이되 비현실적인, 그러나 결국은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에 지나지 않는 그런 꿈이 아니라, 실제와 뒤엉킨, 실제와 분간되지 않는, 혹은 실제를 불러오는 꿈이다.
그러하기에 그 속에서 상상과 실제는 유쾌하게 전도되어 있으며, 상상이 불러일으키는 ‘충동’은 기이하게도 실제보다도 더 뚜렷한 실재감을 동반하고 있다.
‘꿈’은 ‘충동’에 대한 소설이다. 소설 속의 ‘나’는 테니스코트에서 죽어 가는 쥐를 내리치기도 하고, 여행 중 만난 아이를 돌멩이가 든 양말로 내리치기도 한다. 물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파괴적인 충동은 이러한 행위들 속에 있지 않다. 그러한 행위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다른 점이 있는 파괴적인 충동, 웃음을 향한 충동이 그것이다.
삶을 온통 무(無)로 되돌려버리고 싶은, 존재의 근원까지 뿌리뽑아버리고 싶은 이 파괴적인 충동이야말로 의식의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는 삶의 본원적인 층위이며, 이는 이 소설의 ‘말’들이 흘러나오는 원천이기도 하다.
‘꿈’은 ‘말’에 대한 소설이다. 소설 속의 ‘나’는 말에 사로잡혀 있으며, 동시에 ‘나’를 사로잡고 있는 말들을 ‘나’는 놓아주지 않는다.
말하기의 어려움에 대해 말하는 이 소설의 말들 역시 어려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어떤 이유도 목적도 없는, 그 자체가 이유이자 목적일 따름인 대화들, 서로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을 한사코 피해 가는 단절된 대화들이 소설을 가득 메우고 있다.
소설 속의 화자는 실제 벌레보다는 ‘벌레’라는 단어와 그것이 들어가는 문장을 상대하고 있다. 그리하여 말은 말소리로, 그리고 마침내는 소리로 전환된다. 의미가 ‘실종’된 이 웅얼거림들이야말로 이 소설들의 고유한 언어이다.
‘꿈’은 ‘실종’에 대한 소설이다.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꿈은 이미 실종된 채 그 잔상만을 흐릿하게 남기고 있다.
그 흐릿하고도 모호한 영역에서 발원한 의식의 망막 위로 현실이라는 이름의 무채색 풍경이 흘러 지나간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뿐이다. 이 의식에서 바라본다면, 실종이라는 관념은 찾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나온 생각일 뿐, 어딘가에 있을 그 대상에게는 실종 자체가 그 자신의 존재방식이다. 궁지가 아늑하게 느껴질 수 있는 ‘역설’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결국 ‘꿈’은 ‘역설’에 대한 소설이다. 말도 안 되는 말을 일삼는 인물들, 그러나 약간 모자라는 이 인간들의 존재가 편안하게 느껴지는 역설이 거기에 있다.
분명치 않은 웅얼거림들, 하지만 그 울림의 파편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혹은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는 어떤 것을 정확하게 표현한다는 역설이 거기에 있다. 이 역설이야말로 작가가 이 소설들 속의 그로테스크한 풍경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하는 의미심장한 전언이다.
손정수 문학평론가·계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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