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만나는 시]김신용, '버려진 사람들'

  • 입력 2003년 4월 4일 17시 29분


■김신용, ‘버려진 사람들’

그저 온몸으로 꿈틀거릴 뿐, 나의 노동은

머리가 없어 그대 위한 기교는 아지 못한다

구더기도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를 만들지만

내 땀 다 짜내어도 그대 입힐 눈물

한 방울일 수 없어

햇살 한 잎의 고뇌에도 내 몸은 하얗게 마르고

天刑이듯, 그대 뱉는 침 벗삼아 내 울음

알몸 한 벌 지어 오직 꿈틀거림의 노래를 들려주겠다

이 세상의 모든 빛,

그대 사랑에게 겸허히 잡혀 먹히어 주겠다

나를 지킬 무기는 없어

비록 어둡고 음울한 습지에 숨어 징그러운

몸뚱이끼리 얽혀 산다 해도 어둠은 결코

謫所가 아니다 몸뚱이가 흙을 품고 있는 한

간음처럼, 대지를 품고 있는 한

우리 암수의 성기가

사흘 밤 사흘 낮을 몸 섞는 풍요로운 꿈으로

모든 버려진 것을 사랑하는 몸짓으로

그대의 땅을 은밀히 잉태하고 있는 한

- 김신용, ‘지렁이의 詩’

88년에 출간되어 한달 만에 절판되었던 김신용의 첫 시집 ‘버려진 사람들’(천년의시작)이 최근에야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시집의 제목처럼 오래도록 잊히고 버려졌던 시들인데도, 이른 봄 삽으로 묵은 땅을 뒤집었을 때 드러나는 검붉은 흙 냄새 같은 게 훅 끼쳐 온다. 그 흙 속에서 막 깨어난 듯 알몸으로 꿈틀거리는 지렁이처럼 이 오래된 시들은 어떤 의장(意匠)도 없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이 시집의 주인공은 그야말로 밑바닥 인생들이다. 청계천을 오가는 지게꾼들, 양동에서 몸을 파는 여인들, 함바(현장식당)에서 겨울을 나는 노동자들, 길에서 구걸하는 부녀와 행려병자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시인 자신인 동시에 그가 동병상련으로 끌어안지 않을 수 없었던 이웃들이기도 하다. 그의 시에서 80년대 여느 민중시들과는 구별되는 원초적인 힘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이런 일체감과 체험의 절박성 때문일 것이다. ‘오직 살아 있기 위하여 / 그저 닥치는 대로 일하는 것뿐인’(‘일일취업소에서’) 그들에게 하루하루는 포장마차에서 들이켜는 ‘폐허 한 잔’(‘잡부일기8 -酒店에서’)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모든 버려진 것을 사랑하는 몸짓으로 / 그대의 땅을 은밀히 잉태하고 있는 한’ ‘어둠은 결코 謫所가 아니’라고 말한다.

노동자나 민중이라는 말 대신 ‘잡부’나 ‘잡풀’이라는 표현을 쓰는 그에게 민중은 미화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일 뿐이다. 이처럼 버려진 존재들에 대한 순정한 사랑이 그로 하여금 어떤 의지적 합일이나 계몽적 의도를 넘어선 힘을 지니게 한다.

그리고 “나의 노동은 머리가 없어 그대 위한 기교는 아지 못한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지만, 육성이 살아 있으면서도 섬세한 언어감각과 견고한 구조력을 보여주는 점 또한 이 시집의 무게를 더해준다.

나희덕 시인·조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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