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양기웅/미국에 신뢰 심어야 한다

  • 입력 2003년 4월 10일 18시 42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승자 없는 평화’와 ‘공개토의를 통한 종전 조건의 협의’ 같은 도덕적이고 민주적인 외교를 제창했다. 그러나 윌슨 대통령의 외교는 외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실패했다. 윌슨 대통령이 말한 ‘승자 없는 평화’는 현실주의적인 유럽의 지도자들에게는 전혀 설득력이 없는 얘기였다. 또한 외교 과정의 공개는 정책 결정을 어렵게 만들었다. 윌슨 대통령의 실패는 도덕과 여론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현실정치의 힘을 과소평가한 데서 기인한다. 도덕적 동기를 가진 외교가 오히려 비도덕적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공개와 토론을 통한 민주적 외교 또한 실패하기 쉽다.

▼대통령 訪美, 균열치유 계기로▼

노무현 대통령은 ‘공개토론을 통한 의사결정’, ‘포용을 통한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이라크전쟁 파병 결정 과정에서의 ‘반전 여론’에 대한 소극적 태도, 그리고 ‘국가인권위 성명에 대한 개인적 평가’ 등에서 윌슨 대통령의 도덕주의적이면서 여론중시 외교 스타일을 생각나게 한다. 노 대통령이 5월 미국을 방문해 한미 정상외교를 하기로 했다. 윌슨 대통령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 기우(杞憂)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몇 가지 제안하고자 한다.

지금 한미 관계에는 현안이 많다. 북핵 문제에 대한 공통의 접근법을 찾아야 하고 한미동맹의 관계 설정도 논의해야 한다. 또한 하이닉스반도체에 대한 미 상무부의 상계관세 부과 결정과 같은 중요한 통상마찰의 해법도 모색해야 한다. 그리고 이라크전쟁의 전후처리 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지도 확보해야 한다.

하지만 그 전에 노 대통령은 한미 관계의 균열부터 치유해야 한다. 몇 해 전부터 한미 관계에는 불협화음과 오해가 증폭되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개인적 소신과 이념적 선호가 외교에 투사되면서 한미 양국은 동상이몽을 하기 시작했고 외교 실무자들은 미국의 외압과 대통령의 내압 사이에 끼여 오도 가도 못하는 ‘정체’ 상태에 빠져들었다. 국내에는 반미 무드가 조성되고 미국에서는 한미동맹의 정체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노 대통령의 이번 방미는 한미 관계의 균열을 봉합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외교가 국가 이익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져야 하고 미국 내 한국 지지 세력에 힘을 실어주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이번의 한미 정상외교에 거는 기대가 크다. 정상외교는 관료조직에 의한 공식적인 교섭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정상이야말로 ‘포괄적 조치’에 합의할 수 있고 대외정책과 국내 정치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으며 합의에 대한 최상의 권위를 제공할 수 있다. 5월의 정상외교에 주목하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정상외교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상간의 신뢰 관계가 선행되어야 한다. 80년대 미국과 일본이 ‘미일역전(美日逆轉)’과 ‘통상마찰’의 우려와 위기 속에서도 양국 관계를 원만하게 관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이른바 ‘론-야스’ 관계, 즉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간의 신뢰 관계에 힘입은 바가 크다. 비슷한 연령대의 노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이번 만남을 계기로 서로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친밀한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다. ‘조지-노짱’ 관계의 탄생을 기대한다.

▼‘조지-노짱’ 관계의 탄생 기대▼

하지만 무엇보다 정치적 신뢰 관계는 동맹 관계의 상호 확신에서 출발한다. 노 대통령은 이번 방미에서 ‘한반도 전쟁 불가론’을 거듭 강조하면서도 북한이 끝내 ‘벼랑끝 외교’에 의존할 경우 대북 제재가 불가피하다는 입장도 함께 밝힘으로써 한미 공조를 강조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목이 긴요하다. 우리는 북-미 관계의 중재자가 아니라 미국의 동맹국임을 이번 방미 외교에서 부시 대통령에게 확신시켜 주어야 한다. 다자구도 속의 양자대화라는 우리측 안을 설득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설득되지 않을 경우의 대안도 준비했으면 한다. 한미 관계의 포괄적인 ‘로드맵’과 정상간의 상호신뢰, 그리고 외교현실을 직시하는 정치적 지혜가 요구된다.

양기웅 한림대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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