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시의적절함’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책이 있다. 아마 몇 달 전이었다면 ‘소수자’ 문제를 급진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책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한국사회가 형성시킨 내적 억압을 청산하는 새로운 주체들의 가능성에 축복하면 되는 일이지 주체의 힘을 신뢰하지 않고 현장에서 벗어나 있는 듯한 글쓰기를 하는 데 대해 불편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을 보면서 생각하는 ‘시의적절함’은 ‘슬픔의 내적 청산’을 통한 사회의 새로운 구성에 대한 꿈이 좌절되는 일련의 상황과 맞물려 있다.
나는 요즘 TV 화면에서, 언론의 활자에서, 전후 이라크 복구에 관심을 두고 움직이고 있는 ‘참여’ 정부와 기업인에게서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의 얼굴과 성조기가 자꾸 겹쳐지는 경험을 한다. 또 반전을 주장하고 파병을 찬성하는 의원에 대한 낙선운동을 주장하면서도 자신과 연고관계에 있던 행정부의 인물들에 대한 ‘소환’ 이야기는 하지 않는 일부 시민단체의 알 수 없는 이중성을 ‘운동의 권력화’가 아니고서는 풀어낼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우울증’을 경험한다. 특히 새로운 세대들의 ‘좌절’이 눈에 밟힌다. 새로운 세대들에게 무력감을 조장하는 일련의 실천들에 대해서 “권력에 저항하지 않은 사람은 발언권이 없다”고 말한 정부에서는 누군가가 좀 책임을 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기도 했다. 이런 희망조차도 좌절되고 있는 요즘 ‘영웅들의 웅장하고 권위적인 기념비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름 없이, 말도 없이 사라져 간 ‘탈영자’들의 기념비를 통해서’ 새로운 구원을 얻자는 이 책의 메시지가 나를 유일하게 위안한다.
이 책은 ‘짜릿한’ 질문을 던진다. ‘국민’이라는 수사학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남성이 그려내고 싶은 ‘정물’로 존재하는 여성 신화를 어떻게 풀 것인지, 운동의 희생자들을 ‘국가’유공자로 만드는 이 집요한 ‘국민의 시간’을 넘어설 수 있는지, 정부에 참여하는 지식인들이 국정논리와 운동논리가 혼재시키는 위험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를 묻는다.
1부에서 크고 거룩한 주체들이 구성되는 과정을 풀어내는 이야기들에 이어 2부에서는 가족주의, 경쟁주의 등 일상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를 드러내 보인다. 이들 이야기는 지금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안전한 이데올로기’ 바깥에는 ‘공포’만이 있다는 것을 환기시켜 주체를 규율하는 힘들, 그리고 문화적으로 ‘소수자’를 안전하게 처리하면서 주류에 대한 환상을 재생산하는 담론과 실천들을 직시할 것을 요구한다.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이야기는 병역거부자, 성판매자, 동성애자, 빈민, 국제이주노동자라는 주체들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이 책의 제목에서 탈영자‘들’이라고 복수로 주의 깊게 표기한 주체들의 이야기는 재구성되는 ‘국민’, ‘시민’의 범주에서 배제되고 있는 주체들의 사례다. 이들 주체의 이야기는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구조 등의 거대한 문제를 통해 구체적 목소리를 소멸시키는 담론이 배제하는 간극 사이에서 목소리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드러낸다. 어떤 인권은 말해질 수 있고 어떤 인권은 말해질 수 없다는 인식에 대한 반성은 구체적인 개인의 인권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결국 체계의 질서에서 벗어나는 문제는 자신이 근거하고 있는 구체적 현장 만들기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카를 마르크스의 말처럼 해방은 항상 그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해방은 자신이 스스로를 대표하지 않는 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지적 현장이 만들어지고 실천 과정에서 제기되는 구체적 문제를 풀기 위한 ‘대화’가 가능하다면 상황이 어떠하든 좌절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좌절감이 만연한 이 시대를 살아내기 위해서는 ‘진정한 독립’을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 점에 이 책의 ‘미덕’이 있다.
전효관 하자센터 부소장 junk@haja.or.kr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