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이병훈/제대로된 자연과학박물관 세우자

  • 입력 2003년 4월 20일 18시 26분


오늘은 제36회 ‘과학의 날’이다. 신년 벽두부터 몰아쳤던 변화와 개혁의 바람 중 과학자들은 ‘과학기술중심 사회 건설’이란 캐치프레이즈에 기대를 걸고 있다. 이는 무역규모 12위의 경제 강국이면서도 과학부문 노벨상 하나 타지 못한 나라의 주눅 든 자존심을 찾고자 하는 몸부림일 것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중심 사회는 입시제도, 연구개발 투자, 우수인력 확보와 우수과학자 포상 등으로만 이뤄질 수는 없다. 사회 전반에 과학적 합리주의와 창의적 사고를 확산시킬 수 있는 인프라 구축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에서 과학기술을 즐기며 배우는 과학관이나 자연사박물관 등 자연과학박물관이 많이 설립돼야 한다. 선진국의 경우 국민소득과 인구가 많을수록 자연과학박물관이 늘고 노벨상 수상자 수도 그에 비례한다.

한국의 과학관은 현재 40여개로 인구기준으로 볼 때 선진국의 10분의 1도 안 된다. 그나마 영세하기 짝이 없다. 자연사박물관은 한술 더 떠 1000만명에 1개꼴인 4개에 불과하다. 이 또한 전시내용이 부실해 국제 통계상 ‘0’으로 나와 있다. 이러한 ‘비과학적’ 풍토에서 어떻게 과학기술 중심 사회를 바라고 노벨상을 기대할 수 있을까.

하긴 현재 정부 차원에서 자연과학박물관을 만드는 일이 진행되거나 계획 중에 있다. 그러나 경기 과천시에 들어설 국립과학관은 ‘개념 공모’라는 유례없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구름처럼 모여든 업체들은 외국의 자연과학박물관을 베껴오기에 급급하다는 지적도 있다.

국립자연사박물관 건립 계획도 1990년 이전부터 해마다 봄이면 신문에 대서특필만 되다가 95년 문민정부가 그 건설을 결정했지만, 국민의 정부에 들어 타당성이 낮다며 중단했다. 당시 학계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제출하고 각계에 호소했으나 기획예산처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문제는 국가의 자연유산과 대중 과학교육에 시장논리를 적용하는 정부의 몰상식이다. 돈 벌기에만 급급할 뿐 무엇이 나라의 기본이고 저력인지를 아는 통찰력과 철학이 없다.

한편 이 같은 자연과학박물관 건립 추진은 전문학자보다는 공무원들이 책임을 맡아 내용의 전문성과 일관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 출범했던 환경부의 생물다양성센터도 전문학자가 잠시 책임자로 있다가 곧 행정 관리로 바뀌었다. 국립자연사박물관을 만든다는 문화관광부도 장관은 물론 담당 국 과장, 사무관이 수없이 바뀐 데다 추진위원회마저 공무원이 위원장으로 앉아 있었다. 이 자리들은 관리들이 승진하고 거쳐 가는 징검다리일 뿐이다. 공무원들이 극도의 관료주의와 부처이기주의를 포기하는 의식혁명을 하지 않고는 과학기술중심 사회 건설은 요원하기만 하다.

미국 국회의사당 양편에 자리 잡은 스미스소니언은 16개의 박물관과 9개의 연구소를 거느린 미국 문화의 상징이다. ‘동북아 중심을 외치는 우리는 왜 한국의 스미스소니언을 만들지 못하는가. 국립자연사박물관의 건립도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 당시 공약한 것이다. 미군이 용산기지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면 국립중앙박물관을 중심으로 한 이곳에다 한반도 과학문화의 총 본산을 세워 노 대통령이 ‘과학문화 대통령’으로 남게 되기를 간곡히 바란다.

이병훈 전북대 명예교수·자연사박물관연구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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