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영언/정지용 詩語

  • 입력 2003년 4월 23일 18시 20분


정지용(鄭芝溶·1902∼?) 시인이 어느 날 “왜 산문이나 소설은 쓰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대답했다. “나는 긴 글을 잘 쓰지 못한다. 그것은 하늘이 내려준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에 있어 그는 확실히 ‘하늘이 내려준 사람’이라고 부를 만하다. 한국의 시사(詩史)에서 그만큼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언어를 잘 구사한 시인도 드물다. 그가 사용한 시어들이 어쩌면 그렇게 상황에 맞는 표현인지 섬세하고 감각적인 언어의 구사가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가 ‘언어의 마술사’란 호칭을 얻게 된 것은 대표작인 ‘향수’가 발표되면서부터였다.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얼룩빽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회돌아’ ‘해설피’ 등 순수에서 우러나온 감각적 언어들이 마치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한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후 잇달아 발표된 시들에는 사전에도 없는 섬세한 신조어들이 등장한다. 당시 그는 문인들에게 “옥에 티나 미인의 이마에 사마귀 하나야 버리기 아까운 점도 있겠으나 서정시에 말 한 개 밉게 놓인 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의 이 같은 시적 완벽성 추구는 유치환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등 다른 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문학평론가들은 평가한다.

▷이번에 고려대 최동호 교수가 ‘문학사상’ 5월호에 발표한 ‘정지용 시어의 다양성과 통계적 특성’이란 글은 언어의 조탁(彫琢)에 세심하게 공들인 그의 노력을 구체적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이에 따르면 그의 시 132편에 사용된 어휘는 모두 8975개였다. 신체어 감각어 감정어 동물어 등 그가 캐낸 시어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푸짐했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최 교수는 특히 이 중 감정어에 ‘울다’ ‘슬프다’가 많은 것은 정지용 시의 기본정서가 슬픔의 감정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시에 나타난 슬픔은 결국 그의 운명에 대한 예고편이었을까. 그의 시어는 푸짐했지만 삶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6·25전쟁을 전후한 혼란기에 ‘월북’ 꼬리표를 달고 잠적했고 40년이 지나서야 ‘납북’으로 인정돼 문학적 복권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가 언제 어떻게 삶을 마쳤는지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의 아들딸들은 지금도 남북으로 갈라져 사는 아픔을 겪고 있다. 하지만 그가 이 땅에 남겨 놓고 간 수많은 시어들은 우리의 문학적 재산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 그것을 더욱 갈고 닦는 것은 민족의 대시인에 대한 후손들의 예의리라.

송영언 논설위원 young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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