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8월 26일 김정태(金正泰) 동원증권 사장이 신임 주택은행장으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들은 이 은행 리스크관리팀 김영일(金英日) 팀장(2급·일반 은행 차장급에 해당)은 한숨을 내쉬었다.
김 팀장은 김 사장이 복수 은행장 후보로 부상하자 취임에 앞장서 반대해 온 이른바 ‘안티 김정태 세력’의 핵심. 부장단 모임에서 반대성명서를 대표 집필했고, 부장단 대표 자격으로 인선위원장을 만나 ‘김정태 불가론’을 역설했다. 내부 인사가 행장이 돼야 한다는 은행 내 목소리를 대변했던 것.
부임 후 김 팀장으로부터도 업무 보고를 받던 김 행장은 리스크 관리 계정이 잘못된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다음날 아침 김 팀장은 행장실에 찾아가 밤새 쓴 보고서를 내밀며 증권과 은행간 리스크 관리 체계의 차이를 설명했다.
이때부터 김 팀장은 행장실에 수시로 불려가는 사람 중 한 명이 됐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선지 그는 전략기획 등 핵심 업무를 맡으며 고속 승진했다. 3개월 후 1급 부장으로, 3개월 후 본부장으로, 다시 6개월 후 전략본부 담당 부행장이 됐다.
김 행장은 왜 그를 그토록 중용했을까. 김 행장의 설명.
“취임하니까 누구누구가 앞장서서 당신을 반대했다는 고자질이 여기저기서 들어오더군요. 물론 김 팀장 이름도 들었지요. 서로 물어뜯는 한심한 풍토였습니다. 그런데 업무에 관한 김 팀장의 설명을 들어보니 전체의 시각에서 문제를 보려고 노력하더라고요. 보통 자기 것만 들고 와서 자기 분야의 관점에서만 얘기하는데 이 친구는 달랐어요. 한참 열띠게 토론하고 또 부르고 그랬지요.”
김 행장은 김 팀장에게 시험 삼아 어려운 일을 맡겨봤다. 잘 해냈다. 더 독한 일을 맡겼는데 역시 잘 해냈다. 성실성도 돋보였지만 언제나 결과물이 좋았다. 철저한 ‘시장주의자’로 오로지 능력과 실적을 인사원칙으로 강조해 온 김 행장의 선구안에 딱 맞은 것.
물론 인사권자라면 누구나 능력과 실적 위주의 공정한 인사를 강조하지만 김 행장은 이를 실천으로 보여 온 경영자로 손꼽힌다. 신기섭(申琪燮) 부행장 발탁도 그 한 사례.
“무척 똑똑하던데 데리고 일해 보시지 그래요.”(김 행장)
“같이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고위 간부들)
김 행장은 취임 후 재목감으로 눈여겨본 신기섭 자산유동화팀장(2급)을 요직으로 발탁하고 싶었다. 그러나 간부들은 고개를 저었다. “말을 안 듣고 자기 고집만 세다”는 이유였다. 취임 후 직원 인사권을 모두 해당 사업본부장(부행장)들에게 위임한 터라 더 권하면 인사권 침해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김 행장이 신 팀장을 눈여겨보게 된 것은 자본시장에 대한 그의 분석을 듣고부터. 인사팀에 물어보니 차장급인데 부장급 일을 훌륭히 해내고 있었다. 김 행장은 일단 더 지켜보기로 했다. 신 팀장은 계속 눈부신 실적을 올렸다.
‘이러다 아까운 재목을 썩혀버리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하던 김 행장은 지난해 3월 파격 인사를 단행했다. 신 팀장을 부행장으로 껑충 승진시킨 것. 1급과 지역본부장급을 건너뛴 파격 승진이었다. 다들 안 쓰겠다고 하니까, 아예 윗사람이 없는 (행장을 제외하고) 자리를 줘서 능력 발휘를 시켜보겠다는 모험이었다. 그러면서 신 팀장을 불러 단단히 충고했다.
“당신을 좋아하는 상사가 없다. 오로지 당신 능력을 보고 부행장을 시키는 거다. 하지만 아래위로 두루 잘해야 한다. 우길 땐 우겨도 인간관계도 중요하다.”
김 행장의 모험은 성공했을까. 아직 결론을 내리기가 이를지 모르지만 신 팀장은 자본시장 담당 임원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 기자가 만나본 직원들의 평가였다. 김 행장은 기자에게 “사실 들을 땐 언짢아도 신 팀장이 우기는 이야기가 맞을 때가 많다. 말만 좀 예쁘게 하면 좋을 텐데, 말을 참 고약하게 하지”라며 웃었다.
▼김정태 행상은?▼
과감한 인사 개혁과 경영 실적으로 주목을 받아 온 전문경영인. 증권회사 말단 직원으로 시작, 33세 때 대신증권 상무로 발탁됐으며 동원창업투자 대표, 동원증권 사장을 거쳐 1998년 주택은행장, 2001년 통합 국민은행장이 됐다. 국내 최초의 스톡옵션제 도입, 연공서열 파괴 인사, 투명 무차입 경영 등 끊임없는 경영 혁신을 추진해 왔다. 서울대 상대 졸. 56세.
이기홍기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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